한국전쟁 폐허 속 '선한 사마리아인' 자처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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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폐허 속 '선한 사마리아인' 자처한 교회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8.06.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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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 피어난 한국교회 섬김과 부흥②

68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한국전쟁은 한반도에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힘차게 일어난 우리민족은 국가재건을 위해 저력을 모았고 그 결과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거듭날 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이때 고난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와 구제에 힘쓰며 국난극복에 동참했던 교회의 모습을 기억하는 성도는 얼마나 될까. '한국전쟁 속 교회의 역할' 기획 그 두 번째로는 나라와 민족을 도우며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을 싹틔운 당시 교회의 구제·선교 사역을 살펴본다. 

전쟁 직후 구국운동 나선 교회
불붙는 격전의 연속, 한국전쟁 동안 거리는 피난민들의 탄식과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27일까지 3년1개월 간 민족사상 최악의 비극을 초래했다. 국토는 초토화됐고 잔인한 이념대립으로 사상자는 400만명, 이산가족은 1000만명에 육박했다. 수많은 고아·빈민·과부가 발생했고 폐결핵·천연두 등 전염병이 창궐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한국교회는 자체적으로 또는 해외기구들의 원조를 얻어 두려움과 궁핍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우선 한국교회는 전쟁 이튿날인 6월26일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서울에 '대한기독교구제회'를 조직해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구국활동에 앞장섰다. 구제회는 곧 북한 공산군이 서울로 밀어닥치면서 와해됐으나 같은 해 7월 한국교회 각 교단 대표들을 주축으로 대전에 '대한기독교구국회'를 창립함으로써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후 구국회는 전국에 30개 지부를 세우고 국방부와 협력했다. 구국기도집회를 갖는가 하면 9월28일 서울 수복 후에는 청년 1000명을 모집해 국군과 UN군이 점령하는 북한지역 곳곳에 파송하기도. 이를 두고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다소 이견이 있다. 교회가 전쟁을 지원했다는 부정적 견해가 있는 반면, 전쟁 후 기독교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시도된 최초의 구국활동이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기도 한다. 

군종제도 탄생…군선교의 새 장 열려
한국전쟁 중 교회의 구국활동은 군종제도를 발판 삼아 군선교로 이어졌다. 먼저 한국교회 안에서 군종제도가 논의되기 시작한 때는 1949년이다. 이후 전쟁이 터지고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한 병사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군종제도의 도입을 호소했다. 이 편지에는 "성직자가 군에 들어와 전투에 임하는 장병들의 가슴을 신앙의 철판으로 무장시키고 기도로 죽음의 두려움을 없게 하여 주옵소서"란 내용이 담겼다. 이후 1950년 9월 미군의 군종장교였던 캐럴 신부와 감리교 선교사 쇼우 목사가 정부에 군종제도의 필요성과 효과를 재차 주장하면서 1951년 2월 창설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경직 목사는 군대야말로 복음의 황금어장이라고 생각하고 영락교회의 도움을 얻어 군목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군대 안 예배당 신축 및 집회 개최에 힘을 쏟았다. 영락교회 사단법인 한경직기념사업회 김응신 목사는 "구국활동에 이어 자연스레 군 선교에 눈을 뜬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 위협 아래 조국을 지키는 군인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봤고 이를 곧 애국과 건국운동으로 봤다"고 전했다. 

폐허 속에 타오른 교회 부흥
한편 한국교회는 해외 교회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파괴된 예배당을 재건하는 사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1951년 3월 남한교회들은 '한국기독교연합 전시비상대책위원회'를 수립,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 및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전쟁의 실상을 알리고 원조를 요청하는 호소문을 보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1월14일 각 교파를 망라한 '재건연구위원회'를 결성했다. 

기독교세계봉사회(CWS)·국제선교협의회(IMC) 등 세계 교회기구들은 재건연구위원회를 통해 한국을 시찰했고 각국에서 모아진 원조를 보내왔다. 여기에 국내 기독교인들의 십시일반 헌금이 더해지면서 한국교회는 '교회와 주일학교·교육과 문화·사회 후생·농촌·경제·산업' 등 총 6개 분야에 걸쳐 재건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각 교회 예배당은 물론 YMCA·성서공회·기독교서회 등 연합기관과 기독교대학·병원 등이 살아났다.

교회재건은 건물 복구에만 한정되지 않고 교파별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폭넓게 이뤄졌다. 세계적인 부흥강사 밥 피어스와 빌리 그래함 목사가 내한해 전도 집회를 개최했고 장로교 전재선 목사·감리교 박재봉 목사·성결교 이성봉 목사 등 국내 부흥사들의 활약도 대단했다. 고난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성도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교세는 날로 확장됐다.

장신대 박보경 교수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한국 교회의 역할' 논문을 통해 "전쟁 중 부흥운동은 파괴된 교회를 재건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신자를 교회로 초청하는 적극적인 전도 활동까지 포함한 것"이라며 "부흥집회를 통해 개개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시련을 이길 신앙의 힘을 길러줬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교회 성장으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강도만난 자의 이웃 돼준 교회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뜨겁게 부흥한 한국교회는 다양한 구제사업을 펼쳐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재건연구위원회는 해외 기독교구호단체들로부터 식량·생필품 등 구호물품을 지원받아 피난민들에게 전달하는 중심지 역할을 병행했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전쟁의 참상에 대응 여력이 부족한 정부와 민간단체의 책임을 나눠진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를 위해 구호활동을 벌였던 해외 기독교구호단체들로는 기독교세계봉사회·컴패션·월드비전 등이 있다. 1951년 한국에 지부를 결성한 기독교세계봉사회는 미국·호주 등 세계 각국의 교회들로부터 지원받은 분유·밀가루·쌀·기름 등의 식료품과 의류를 대대적으로 공급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이 물자들을 고아원·모자원·나환자 요양소·결핵 요양원 등으로 보급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위한 사역도 지속됐다. 컴패션은 미국 에베레트 스완슨 목사가 1952년 부흥회를 인도하러 한국에 왔다가 거리에 쓰레기와 뒤섞인 채 혹독한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목격하고 만든 국제어린이양육기구다. 스완슨 목사는 1961년까지 전국에 100개가 넘는 고아원을 세우고 어린이들에게 의식주와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한편 1:1 결연을 통해 따뜻한 사랑까지 느낄 수 있도록 했다. 1950년 한경직 목사와 밥 피어스 목사가 함께 세운 월드비전 역시 영유아원·농아원 등의 시설을 지원하고 의료선교를 펼쳤다. 

이 밖에도 교회들은 성경구락부를 통해 빈곤 청소년들에게 성경과 한글, 초등교육에 필요한 일반상식을 가르쳤고 YWCA는 미망인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취업알선을 주도했다. 세브란스 병원 등 기독 의료기관들은 전상자 치료 및 재활사업에 여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구제사업 이외에도 교회는 전쟁통에 흐트러진 윤리의식의 회복을 위해 금주·금연 등의 절제운동을 벌여 사회질서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호남신대 차종순 교수는 "외국 구호물자가 예배당에 도착하면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몰려들었다"면서 "선교사와 교회는 전쟁으로 삶이 강퍅해진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여는 열쇠였다. 교회의 대사회적 구제역할은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줘 신자들이 증가하는 요인이 됐고 오늘날 부흥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호남신대 최상도 교수는 "한국전쟁 때 교회는 낮은 곳에서 신음하는 약자의 손을 잡아주는데 혼신을 다했다"면서 "무엇보다 국가적 위기 앞에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 똘똘 뭉쳐 연합했던 당시 교회의 모습을 오늘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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