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셋째주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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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셋째주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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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1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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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 성도의 나라사랑 / 느헤미야 1:1~11 / 찬송: 350장

6월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6.25전쟁이 있었던 달입니다. 그때 수많은 선열들을 포함한 16개국의 유엔군들이 우리의 오늘을 위해서 그들의 내일을 포기하며 고귀한 피를 흘렸습니다. 자유는 절대로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라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면, 비참하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인들은 모두 위대한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왕궁의 술을 관리하는 자로서, 왕의 가장 측근이지만, 자기 형제 하나니와 함께 온 자들로부터 고국의 어려운 상황(3절)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민족의 비참한 모습을 생각하고, 느헤미야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며 금식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민족의 죄악을, 자기 죄로 여길 뿐 아니라 동족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아픔과 고통으로 알고, 구원해 주기를 기도했습니다.

개인의 영달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민족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민족적 죄악을 내 죄처럼 회개하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입니다.

지금은 각종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 그리고 분열과 갈등의 영으로 충만한 우리나라를 위해서 진실로 회개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주여,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한 우리나라를 고쳐 주옵소서. 아멘.

박선원 목사 / 평화교회

 

화요일 / 마귀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자들 / 요한계시록 9:1~12 / 찬송: 370장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시험 속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이들은 자신이 마귀의 손 아래 있다는 사실도 모릅니다. 성도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권세를 받은 황충(1~3절). 하나님은 마귀가 하나님의 인을 이마에 받은 성도들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제한하십니다. 다섯째 나팔이 울리자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열쇠를 받아 무저갱을 열어 버립니다. 무저갱에서 연기와 함께 올라온 황충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괴로움을 주는 황충(4~6절). 하나님은 마귀가 세상에 속한 자들을 괴롭게 하는 것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황충에게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다섯 달 동안 해할 권세를 주십니다. 이에 악인들은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할 정도로 고통 받게 됩니다. 마귀를 따르는 자들에게 잠시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이내 멸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버립니다.

끝나지 않은 재앙(7~12절). 하나님은 마귀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시행할 수 있는 강력한 권세를 주십니다. 황충들은 전쟁을 예비한 자들의 모양을 하고 자신들의 왕인 아바돈을 따라 사람들을 해합니다. 그들은 조직적이고 강력하게 심판을 시행합니다. 마귀는 악인들을 이끌고 멸망으로 나가갑니다.

 

•오늘의 기도

마귀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악인들에게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 마귀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건져주소서.

김종명 목사 / 제주평안교회

 

수요일 / 능력은 절대성에서 나옵니다 / 사도행전 4:5~12 / 찬송: 354장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하자 제일 반대한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형식적인 종교를 통해 기득권을 구축하고 있던 종교 관련 종사자들이었습니다(1절). 기독교에 대한 첫 번째 박해자들이 메시아를 기다리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아이러니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은 ‘형식적인 종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위가 올라가고, 지식이 많아지고, 형식이 정교해지고, 기득권층이 된다는 것은 복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끈임 없는 개혁과 함께 더욱더 깨어 근신해야 합니다.

유대의 최고 권력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도들에게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병자를 낫게 했느냐고 물었습니다(7절). 나이가 지긋한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질문에 30대 중반의 젊은 베드로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예수님을 변호하는 말씀을 전했습니다(8-12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12절).”

얼마나 확고하고 단호합니까? 이런 확고함과 절대성이 있어야 능력 있는 삶도 나옵니다.

능력은 상대적인 것보다 절대적인 것에서 나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은데 저것이 좀더 나은 것 같다!”라는 식으로 하면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늘의 기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당당히 예수님을 전한 베드로 처럼 절대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하소서.

최종환 목사 / 송천교회

 

목요일 / 참된 축복 / 요한삼서 1:1~2 / 찬송: 510장

사람들은 축복은 원하지만 대가는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와 변화가 있다면 진정한 기쁨과 축복도 반드시 뒤따를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참된 축복이란 “악인의 꾀에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위해 두 가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기 ‘잘 되다’는 가이오의 삶이 형통하도록 축복한 것이고, 둘째는 가이오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 ‘강건’은 육체적 건강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복을 빌어주기 전부터 가이오는 이미 복을 받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진리이신 예수님 안에 있었으므로 그가 하는 모든 일이 잘 되고 육신도 강건한 삶을 살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영육간의 강건함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영혼이 온전한 사람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죄악을 멀리하고 함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욱 존귀하고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진리 되신 예수님 안에서 삶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함의 참된 축복임을 알게 하옵소서!

김자종 목사 / 열리는교회

 

금요일 /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라 / 에스겔 20:18~22 / 찬송: 91장

하나님은 이름을 가지신 분으로서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계명 중에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명령을 하시면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건짐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자,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당장 분을 내어 이들에게 노를 쏟고 싶으셨지만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참으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한 것을 목도한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유다백성을 영원히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다시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심도(41절) 결국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엄청나게 소중히 여기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예수’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시고, 이 땅에 사는 누구라도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명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기도

모든 성도들이 예수 이름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황규식 목사 / 수지산성교회

 

토요일 /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 / 마가복음 4:26~32 / 찬송: 210장

예수님은 여러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어떠한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는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26절)

성경 본문은 씨 뿌리는 자의 수고가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시126:5-6).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 원리는 씨 뿌리는 자는 씨만 뿌릴 뿐 그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27절). 즉 씨가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여 추수하도록 만드시는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이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전도인의 최대의 사명은 성령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보내심을 받은 곳에 복음의 씨앗을 눈물로 뿌리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28절)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 전도인의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31-32절)

겨자씨는 당시 농경사회의 유대인들에게는 ‘하찮은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하찮고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전도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기대하며 보내심을 받은 곳에서 주의 복음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소서.

이용덕 목사 / 광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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