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의 아들!
상태바
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의 아들!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8.06.14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㊿
▲ 자메 티소트, 안식일에 귀신들려 병든 여자를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 1886~1894년

누가복음 13장 16-17>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며칠 전 화가 잔뜩 난 후배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30분 정도 후배의 말을 들어주었는데 한 마디로 자신이 ‘맘충’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친구 모임 때문에 파주에서 강남까지 시간을 들여 한 유명 카페에 갔는데, 데리고 간 아이가 어리다고 못 들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는 어리지만 예의바르다’고 아무리 말해도 ‘다들 그렇게 말하지만 결국에는 사고를 일으킨다’며 냉정하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3명의 친구들이 자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야 했다며 하소연을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맘충 말고도 갖가지 비속어를 써가며 ‘나 또는 우리’와 잘 맞지 않는 개인이나 그룹, 집단을 소외시키고, 비하하며, 심지어 심각한 피해를 주는 예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아기 엄마들이 많다보니 특히 맘충에 대한 사례를 자주 보고듣게 된다. 그런 말끝에 씁쓸한 말꼬리가 붙는 경우가 있다. ‘우리 애가 재벌집 아들이라면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을 건데.’ ‘국회의원이나 장관 집 자식이라면 그렇게 했겠어?’ ‘행세 좀 하는 집 자식이라면 어서옵셔 했을 거야. 자기네 가게 홍보된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 기독인들이 꽤 있는데 단 한 사람도 ‘내 아이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택함받은 족속이요, 하나님의 진귀한 보석이요...’하며 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이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자녀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누가복음을 읽다가 참으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19장에서 주님이 삭개오 집을 방문했을 때, 삭개오가 서서(누가는 ‘서서’라는 말을 일부러 강조한 것 같다. 예수님이 찾아와주시는 것을 너무도 기뻐하는 마음. 그리고 당장이라도 자기의 죄를 갚아나갈 실천할 자세를 예고하듯이) 말한다.

‘주님, 보시옵소서! (삭개오는 “Look, Lord!라며 소리치듯 말한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삭개오의 진실한 마음을 보시고 얼마나 기쁘셨는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라고 하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아들’이다.(물론 나는 신학적으로 철저히 조사할 능력은 없으나, 영어 성경들은 a son of Abraham이라고 했으며, 킹제임스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직접 한 사람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한 경우는 삭개오가 유일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은 삭개오보다 앞서 안식일에 성전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그 여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들려 시달리며, 허리까지 굽어서, 몸을 조금도 펼 수 없기에 기어 다니며 사는 가련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상상을 해보라 18년 동안이나 기어 다니는 여자.... 얼마나 비참할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여자를 주님 앞으로 오게 한다. 사람도 많은 성전 안이다. 모두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데 짐승처럼 기어가야한다. 어쩌면 예수님은 여자의 비참하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나을 가망 없는 상태를 정확히 보여주려고 그러셨는지도 모른다.

자존심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으로 기어온 여자를 예수님은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은 맹비난한다. ‘안식일에 그런 짓 하지 마!’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나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예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신 때가 딱 한번인데, 그 대상이 바로 짐승처럼 기어 다니던 비참한 여자라니!

“아브라함의 아들”은 키 작고, 교인들에게 죄인 취급받으며, 동족들에게 악착같이 세금징수하며 사는 삭개오이며, “아브라함의 딸”은 아무 직업도 능력도 없이. 그저 짐승처럼 기어다니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면서도 성전을 찾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여지라니!   

두 사람의 가장 큰 공통점은 예수님을, 성전을 찾았다는 것이다.
‘내 딸(아들)이 누구 집 자녀였다면, 왕같은 대접을 받을텐데...’ 라고 한숨 쉬기 전에 진정으로 나와 아이들이 ‘아브라함의 딸과 아들’인지 생각하길 간절히 권한다.

함께 기도

하나님. 우리는 힘들 때는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울고불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숨 돌리면 까맣게 잊고 세상 권력, 물질 가진 아버지를 부러워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한심우매한 우리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