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 교회는 약자 보듬고 사회 중재자 역할 감당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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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 교회는 약자 보듬고 사회 중재자 역할 감당해야"
  • 김수연 기자
  • 승인 2018.06.08 11: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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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크레첼(78) 목사 '독일통일에서 교회의 역할' 강연
▲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은 7일 서울 양재온누리교회에서 '독일통일에서 교회 역할'을 주제로 학술회를 개최했다.

"통일시 교회는 약자를 보듬고 사회 중재자 역할 감당해야 한다." 최근 한반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교회의 기도가 뜨거워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독일통일의 산 증인 베르너 크레첼(78) 목사가 당시 독일교회의 역할을 조명해 눈길을 끈다.

기독교학술원(원장:김영한 박사)은 7일 서울 양재온누리교회에서 '독일통일에서 교회 역할'을 주제로 학술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30여년 가까이 동독 공산주의 정권에서 목회를 한 크레첼 목사가 발표자로, 전 총신대 총장 정일웅 박사·남북나눔 이사장 지형은 목사·백석대 부총장 주도홍 교수가 토론자로 나섰다.

크레첼 목사는 독일통일 과정에서의 교회역할을 살피기에 앞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서독은 서구의 자유 시장경제를 받아들여 승승장구한 반면 동독은 독재정부와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도입돼 대혼란을 겪었던 분단 상황을 먼저 짚었다.

크레첼 목사는 "수만 명의 동독 시민들이 서독으로 피신했다. 동독은 좋은 노동력을 잃고 인구가 감소하자 장벽을 넘지 못하도록 가시철조망까지 설치했다. 그럼에도 동독 시민들은 서독을 향해 높은 지붕에서 뛰어내릴 만큼 위험한 탈출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총에 맞아 죽는 사람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이때 동독의 교회들 역시 매우 어려웠다. 당시 서구 정치인들은 개신교나 가톨릭에 속했지만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신론을 선포했고 성도들이 교회를 탈퇴하도록 압박했다. 동독 말기에는 인구의 약 20%만 크리스천으로 남았으나 그럼에도 기독교가 완전히 붕괴하지 않은 까닭은 서독교회들의 물심양면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레첼 목사는 "서독의 부유한 교회들은 재정적·정신적·영적 등 다방면으로 동독교회들을 지원했다"며 "우선 적잖은 서독 신학자들이 무신론과 맞서 싸우기 위해 동독으로 갔다. 이때 온 신학자들 중에는 현 독일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의 아버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도 있었다"고 전했다. 1940년 동베를린에서 태어난 크레첼 목사 역시 동독 사람들에게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자발적으로 동독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회를 했다.

그는 아울러 "서독교회가 1970년대 중반부터 동독정부의 협조를 받아내 매년 수천 개의 동독교회를 방문하고 재정을 지원했다. 동독교회들은 필요한 자금의 절반을 서독교회들로부터 받아 목회자들에게 봉급을 주고 교회를 유지시켰다"면서 "서독교회의 후원으로 동독교회들은 정부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덕분에 1980년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야당 정치인이나 평화운동가들은 동독교회에 모일 수 있었고 이는 베를린 자유왕래의 불씨가 된 라이프치히 월요기도회에 수만 명을 모으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평화기도회와 시위운동을 주도한 교회는 결국 동독 정부가 붕괴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크레첼 목사는 통일 전후 과정에서 독일교회가 '사회적 중재자'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했다.

그는 "독재 정권이 끝나면 그동안 힘들었던 국민들이 공산주의 지도자들에 분노하거나 반대로 독재정권의 광기에 사로잡힌 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로 회귀하는 일, 이 과정에서 여러 집단 간 약탈과 갈등, 충돌이 야기된다"며 "교회가 나라 안의 안정과 비폭력을 유지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정치적 공백기가 찾아왔던 5개월 동안 독일교회는 원탁회의를 주도함으로써 이 위기를 잘 관리했다. 그는 "정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개신교 목회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새로운 정당과 정치 그룹을 포함한 모든 기득권 세력들이 초대됐다"며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이들이 민주주의·관용·상호인정·경청 등의 가치를 전해 독일 민주화를 향한 첫 걸음에 기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크레첼 박사는 한국에도 통일 이전에 분야별 원탁회의가 열려 북한 사람들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고 했다.

끝으로 크레첼 목사는 분단과 통일 과정에서 절망을 느낀 사람들을 정신적·신앙적으로 보듬어 줘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임을 강조했다.

통일 직후 독일 상황을 들여다보면 동독은 서독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도로·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이 발달하고 실업률도 낮아졌다. 그러나 동서독 간의 경제적 불균형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서독교회는 동독인을 위로하며 이들이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찾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이때 서독교회가 보여준 '나눔의 미덕'은 독일정부의 난민정책에도 큰 영향을 줬다. 난민 환영문화를 만드는데 교회부터 발 벗고 나서 주거환경 개선, 일자리 제공, 언어교육, 심리상담 등을 지원했고 동시에 교회 구성원이 되도록 독려한 것이다.

크레첼 목사는 다만 서독이 통일 이후 동독이 가진 특수성과 가치관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하고 서독의 기준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던 우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한국교회는 북한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인정하고 상대적으로 약자인 북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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