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상태바
얀 후스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4.17 1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종교개혁의 선구자들(4)

얀 후스(1369∼1415)는 보헤미아(체코)에서 일어난 위클리프의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1383년 영국 왕 리처드 2세가 보헤미아의 안나 공주와 혼인함으로써 두 국가는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많은 보헤미아의 학생들이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와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받아들여 그들의 조국, 특히 프라하 대학으로 갔습니다. 그 결과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1402년부터 후스에 의해 급속히 전파됐습니다. 

후스는 예정구령설을 강조하며, 성서를 유일한 권위로 인정하고, 교황을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의 이른바 성직매매 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체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하였고, 프라하 대주교의 후원을 얻어 프라하대학교 내에서의 체코인의 권리를 신장시켰으며,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正字法)을 확립, 성서와 위클리프의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행하라”고 말하면서 “성서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가 선포한 방침에 따라 보헤미아의 교회를 개혁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성직자들의 탐욕과 사치, 게으름 등 비도덕적인 생활을 공격하고, 당시 교회의 오도된 교리를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면죄부 제도를 비판했으며 성찬에서 떡만이 아니라 잔도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로마교회는 분열의 혼란 중에 있어서 한동안 후스의 움직임을 묵인하고 있었으나, 1410년 피사 종교회의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더 5세는 후스에게 그 동안의 주장들을 철회하도록 명령하였고, 후임 교황인 요하네스 23세도 1411년에 후스를 파문하였습니다. 그는 이단으로 정죄 되었고 그의 책은 불살라졌으며, 콘스탄츠 범 종교회의에 소환되었습니다. 후스는 룩셈부르크의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펼쳐 보여야 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증거하겠다는 각오로 소환에 응하기로 하고, 독일 국왕이었던 지기스문트가 발행한 안전 통행증을 믿고 보헤미아를 떠났으나 1414년 11월 그가 도착하자마자 체포되어 7개월 동안 야만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1415년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고, 변론할 기회나 대화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이단자로 판결 받아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교외에서 화형대에 묶여 처형되었습니다. 

처형 당시 후스는 자신의 이름이 체코어로 ‘거위’를 뜻하는 것에 빗대 “비록 지금 당신들이 나를 거위구이로 만들지라도, 백년 후에 백조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너희들은 그 노랫소리를 잠잠케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100년이 지난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에서 백조처럼 나타난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룹니다.

후스는 화형에 처해졌으나 그의 저서 ‘데 에켈레시아’(1413)는 살아남았습니다. 박해자들이 후스의 육신을 없앨 수는 있지만 그의 사상을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후스의 사상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로마교회가 후스의 목숨을 취했지만, 그의 영향력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후스는 위클리프와 함께 중세 시대에 참된 교회의 회복을 주창했던 위대한 개혁자였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