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오시안더 (1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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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오시안더 (1545년)
  • 주도홍 교수
  • 승인 2018.04.1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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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팩트 종교개혁사 ㉘

1498년 태어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는 인골슈타트대학교에서 루터의 대적자 요한 에크(J. Eck)로부터 신학을 공부한 후, 1522년 독일 남부에 위치한  뉘른베르크의 성 로렌츠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1517년 95조를 접한 후 루터에게 호감을 가졌고, 저명한 화가 뒤러(A. Duerer), 시장 피어크하이머(Willibald Pirckheimer) 등과 함께 종교개혁을 뉘른베르크로 받아들였다. 오시안더는 뉘른베르크를 넘어서 근접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지역에도 가장 의미 있고 영향력 있는 새로운 교회법을 1533년 저술하였다. 1549년 오시안더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공작에 의해 1544년 설립된 쾨닉스대학교의 교수로 부름을 받았다. 여기서 오시안더는 루터의 동역자 멜란히톤과 칭의론에 있어 거대한 논쟁을 벌였다. 멜란히톤에게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는 한 죄인이지만, 오시안더는 동방교회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여 이에 반대하였다.

오시안더는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의 의는 크리스천에게 심겨져, 믿는 자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차이는 종교개혁 시대 신학적 긴장을 가져왔고, 오시안더로 하여금 자기만의 길을 가게 하였다. 인문주의자이며 종교개혁자로 일컫는 오시안더는 헬라어, 라틴어 그리고 아람어에 정통하였는데, 특히 히브리어와 유대교 신비성에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가 유대인에 대한 미움과 잔인한 입장을 드러낼 때, 어떻게라도 그는 루터와 대화를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서 유대인의 인권을 보호하려 했으며, 그 어떠한 반유대주의도 배격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루터는 오시안더에게 따뜻한 편지를 보냈다. 루터는 오시안더를 어떻게 환대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그 편지는 루터가 신학적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볼 수 없는 뜻밖의 내용으로, 가까운 한 친구에게 보내는 위로의 편지 그 자체였다. 루터는 오시안더를 “매우 저명한 사람, 신실하고 곧은 뉘른베르크 교회의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면서, 로마서 14:8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를 인용하며, 거룩한 축복의 인사말을 잊지 않는다.

오시안더가 아내와 딸의 죽음으로 거대한 슬픔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위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평강이 넘치길 바랍니다. 최고로 가장 사랑하는 오시안더, 최근 우리에게 들린 소식은 당신 아내와 당신의 가장 사랑스러운 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도 내 가장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경험하였지만, 딸의 죽음은 당신에게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오. 내가 편지를 쓰는 이유는 확신을 갖게 하려는 것이요. 그 시련이 분명히 하나님이 내리신 시련임을 당신이 믿으며, 우리가 이 시험을 기꺼이 이겨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때 당신은 우리의 신앙과 교리의 올바르고 신실한 동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 바보가 현자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신이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리라 생각하오. 잘 사시오. 확신을 가지시오. 당신은 우리에게 매우 신실한 사람이오. 1545년 6월 3일.”

루터의 편지는 따뜻했고, 겸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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