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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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파(2)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4.1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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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종교개혁의 선구자들(3)

당시 로마교회는 벌게이트역이라고 불리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였기에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긴 위클리프는 그들에게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고자 영어로 성경을 번역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는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성경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하였습니다. 보통 한 권의 성경을 필사하는 데는 열 달 정도 걸렸습니다. 드디어 최초의 영어성경이 나오게 되어 결코 꺼질 수 없는 빛을 영국 국민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1382년에 최초의 완전한 신약성서 영역본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인들은 처음으로 모국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 가격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양의 성경이 필사되자 로마교회 지도자들은 당황하였고 영국 국회는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여 법정에 소환하였습니다. 위클리프는 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자신의 교리를 확신 있게 주장하고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비난을 반박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이익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상품화하고자 하는가? 그대들은 누구와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진리와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을 아는가?” 법정에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런 존 위클리프를 교황청에서 얼마나 미워했는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 후에 그의 유골을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사르고 그 재를 근처 스위프트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개혁적 이단자로 꼽히는 존 위클리프와 롤라드 파는 모두 가톨릭의 성례론과 교황의 권위를 비판하였습니다. 위클리프에 의하면 성경은 신앙의 최종 권위입니다. 그는 1378년 저술한 ‘성경의 진리’에서 “성경은 모든 규범의 기준이다. 이 규범에 의해 교회, 전통, 종교회의 심지어 교황 자신도 공히 평가받아야 한다. 이유는 성경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379년 ‘교황의 권력’에서도 위클리프는 교황 제도는 인간이 세운 제도이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이 아니므로 교황의 세력은 세속 정부에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와 분열에 혐오감을 느낀 위클리프는 이러한 소극적인 접근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고, 1379년 이후로 혁명적인 사상들을 가지고 로마교회의 교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379년에 그는 신자들을 위한 유일한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며,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공격했습니다.

위클리프의 견해는 1382년에 런던에서 정죄되었고 그는 평신도 설교자들의 집단인 ‘롤라드 파’를 세움으로써 그의 사상을 계속하여 전파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롤라드 파는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따르는 복음적인 신앙운동 집단을 의미합니다. 옥스퍼드를 거점으로 한 이 운동은 백성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고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사도적 청빈의 정신으로 전도하는 단체였습니다. 롤라드들은 영국 전역에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설교했습니다. 이 운동이 확산되자 1401년에 로마교회는 의회로 하여금 롤라드 파의 사상을 설교하는 사람들을 세속 당국에 넘겨 화형에 처하라는 내용의 ‘이단자 화형법’을 통과시키게 만들었습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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