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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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왈도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3.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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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 종교개혁의 선구자들(1)

피터 왈도(1140∼1217)는 프랑스 리용에 살고 있었던 부유한 장사꾼으로 젊은 시절 장사로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1173년경 한 동료가 파티에서 급사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고 한 사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묻자, 사제는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마 19:21)는 말씀을 실천하고 성지 순례를 떠날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 후 왈도는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독교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했습니다.

교회의 부패가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한 왈도는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급하고자 하였고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복음서와 시편 등의 성경과 교부들의 글을 번역한 후, 보급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왈도의 개혁운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었으며, 그들을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혹은 ‘왈도파라고 불렀습니다. 

왈도파의 두 가지 신앙고백서 중 ‘14개 조항 신앙고백’에서는, 성경 66권만을 신앙의 유일한 기초로 인정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연옥은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고안된 것이며, 교회 절기나 성자숭배, 성수, 금욕주간, 그리고 미사 제도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다. 세속권도 교회와 함께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속권을 경외하되 순종하며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왈도파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개혁주의적인 신앙을 고백한 장로교도들이었습니다.

1179년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왈도파를 인준받기 위해 왈도는 제3차 라테란 교회회의에 참석하여 개혁운동의 성격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와 신ㆍ구약 주석을 교황 알렉산더 3세에게 제출하였으나 교황청은 청원을 거절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왈도파에 대한 박해를 시작합니다. 1184년 베로나 교회회의는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왈도파에 가담하는 자를 출교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왈도파는 비밀예배를 드리고, 순회설교자들이 이들을 돌보았으며 그 결과 왈도파는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이태리, 폴란드, 오스트리아까지 널리 퍼졌습니다. 

왈도파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고, 122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는 발렌시아 교회회의에서 왈도파를 다시 이단으로 정죄하고 처형하도록 명했습니다. 1380년 교황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수도사를 동원하여 왈도파를 색출해 처형했고, 1487년 교황 이노센트 8세는 18,000여명의 군대를 파견해 왈도파를 진멸하고자 했는데 이 때 백만 명 이상이 처형되었습니다.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왈도파의 성경적인 개혁운동은 이어지고, 그들의 지지세력도 확산되었습니다. 1260년 왈도파는 42개의 교구로 성장하여 많은 신학자들과 학교들이 왈도파를 따랐으며, 특히 보헤미아에서 왈도파의 운동이 두드러졌습니다. 15세기 얀 후스에 의한 개혁운동이 일어나 이 운동은 후스파에 흡수되었습니다. 드디어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왈도파는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였고, 1532년 상포랑 교회회의를 열어 종교개혁을 수용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16세기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평안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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