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욕망의 잔치판, 돌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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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욕망의 잔치판, 돌잔치?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8.03.27 17: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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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㊷
▲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The Holy Children with a Shell. 1670년경.

*누가복음 1:5-25>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 

요즈음은 새생명 탄생 소식이 흔하지 않아서인지 오히려 돌잔치가 화려해지고 있다. 물론 돌잔치의 절정은 돌잡이 순서이다. 말은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청소년들부터 구순 노인까지 시선을 모은다.

아이를 안은 엄마와 그 옆에서 진두지휘(?)하는 아빠는 처음에는 장난스레 웃고 말하지만 자녀의 손이 물건에게 가까워질수록 급격하게 변한다. 얼굴이 벌개지며 소리소리 친다. 아이의 부모 뿐 아니라 참석자 모두가 박수를 치며 큰소리를 낸다.

“마이크!” “골프공!” “마우스!” “금고(황금칠을 한 장난감 금고)!” “자동차!” “빌딩!” 

참 많이 달라지긴 했다. 예전에는 돌잡이 물건으로 학사모, 연필, 책이 필수품으로 올라왔는데, 요즈음은 거의 볼 수가 없다. 돈? 물론 돈은 예나 지금이나 빠지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에는 돈이 개별 품목(?)으로 연필이나 책 옆에 따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에 돈이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이크 골프채, 골프공, 마우스, 자동차.... 거의 모든 물건에 돈을 붙이거나, 감거나 한 점이다. 심지어는 연필도 돈으로 감았고, 책 앞장에도 돈을 붙인다. 요즈음은 보기 드물지만 장수를 뜻하는 실꾸러미에도 돈을 붙여 놓는다. 한 마디로 돈은 당연한 것이고, 생명같은 것이란 말이다. 덕분에 아이는 그 무슨 물건을 손에 잡든 돈은 무조건 획득하는 셈이다. 말이 돌잔치이지 어른들, 아니 현대인들의 치졸하고 천박하다 못해 가련하기까지 한 욕망의 한바탕 잔치를 벌이는 셈이다.  

이런 가련한 행사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게 된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천사로부터 태어날 아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다. 먼저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라고 말해준다. 아들이 태어나면 부모는 당연하며, 동네와 동네를 넘어 많은 사람들이 기뻐한다는 말이다. 한국 부모라면 이런 말을 들을 때 무슨 생각부터 할까? 대부분은 ‘공부 잘하고 건강해서 일류대 가고, 재벌이 돼서 우리집을 살리거나, 대통령이나 판검사나 의사가 되어서 우리 집안을 살리려나?’ 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예수님은 또 어떠하신가?

천사는 어린 신부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1:31-330” 라며 말씀했다.

인간적인 귀로 들으면 요한 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축복의 말씀이다. 지금 엄마들이 이런 말씀을 임신 중에 꿈속에서 받으면 당연 “내 아이가 대통령감이구나!” 하며 환호성을 지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요한 두 분 모두 어떤 인생을 살았으며, 어떻게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는가. 요한은 평생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지내며 장가도 안 가고, 부모님 봉양도 못 하고, 말 한마디 때문에 재판도 없이 목이 잘렸다. 예수님은 한창 청년의 나이에 집을 나와 먹는 것, 잠 잘 곳 변변치 못한 육신이 고단한 삶이었다. 주위에는 늘 인생의 낙오자들만 드글거렸으며, 막판에는 배신까지 당하셨다. 사실, 십자가 사건, 그 순간에는 12제자 모두에게 배신당한 셈이 아닌가! 

두 분 모두 왜 이런 고난이라고 말하기조차 황송한 십자가 길을 피하시지 않고 걸으셨겠는가? 이런 질문에 주일학교 학생들조차 정답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들, 부모이다. 다음세대라는 자녀들에게 돈으로 빙빙 휘감은 돌잡이 마이크나 골프채 대신에 다른 것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만약 예수님이라면 우리 아이들이 돌잔치상에서 무엇을 잡기를 원하실까? 아니, 그 이전에 예수님은 부모들이 아이의 인생이란 책상 위에 무엇을 올려놓기를 원하실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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