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얼굴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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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은 어때요?
  • 노경실 작가
  • 승인 2018.03.1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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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㊵

*시편4: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80:19>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이번 설날에 여동생 부부와 조카가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동생 부부는 다리가 짧은 웰시 코기 남매 강아지, 조카는 페르시안 고양이 잡종 두 마리를 자식처럼 앞세우고 온 것이다. 워낙 강아지와 고양이는 성질이 달라 따로 따로 놀았다. 고양이들의 거만함은 극치를 달렸고, 눈치 빠른 강아지들은 몇 번 접촉을 시도하더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이야기 방향이 동물들의 외모(?)로 향했다.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강아지가 더 예쁘다, 고양이가 더 예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 엄마가 혼잣말로 한 말에 강아지 옹호 편을 승리하게 만들었다. “이쁘면 뭘 해! 강아지들처럼 웃는 상이어야지. 고양이들은 무슨 심통이 났는지 아까 집에 들어설 때부터 지금까지 잔뜩 인상만 쓰잖아. 저런 얼굴을 며칠만 보고 있으면 사람 얼굴까지 망가지겠네.”

그렇다 동물조차도 예쁜 얼굴이 아니라 밝고 귀여운, 사람으로 치면 웃는 상을 좋아한다. 출판사 사람들은 직원을 뽑을 때에 비슷한 조건이라면 인상이 밝고 잘 웃는 사람에게 점수를 더 준다. 이런 대화를 들은 적도 있다. ‘그저 예쁘기만 하면 뭘 해? 자기 미모 믿고 얼굴 가득 거만기가 있으면 될 일도 안 돼요.’ ‘맞아. 우리 사무실에도 인상 밝고 명랑한 직원이 있는데, 한번은 매출이 너무 떨어져서 낙심해서 사무실에 들어갔거든. 그런데 그 직원이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기운이 나는 거야. 사람 살리는 게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

아이들은 학교 수업 마치고 집에 갔을 때에, 그 집이 지하방이든. 월세가 밀린 방이든, 침대 없는 방이든 활짝 웃는 엄마만 있으면 바랄 게 더 없다. 남편은 아내가 절세미인이라도 퇴근하고 들어갔을 때에, 독기를 뿜고 소파에 앉아 있거나. 우울한 얼굴로 울고 있다면 점점 밖으로 나갈 것이다. 아내 역시 그러하다. 말귀를 좀 알아듣지 못해도, 수입이 부족해도, 배가 나왔어도 남편이 늘 다정한 얼굴빛이면 근심이 절반은 줄어든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쳐다봐주시는 얼굴빛은 어떠하랴!

시편 4편은 개역개정 성경에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라고 나왔지만, 표준새번역과 영어 성경에는 조금 더 상세하게(?) 주님의 얼굴을 전해준다. ‘주님, 주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Let the light of your face shine upon us, O LORD.’- 늘 느끼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은 정말 재앙 수준이다.-

상상해 보라! 눈부시도록 밝고 빛나는 얼굴. 이런 얼굴에 화와 분노가 종기처럼 잔뜩 부풀어 올라 있을 수 없다. 복수의 응어리가 혹덩어리처럼 주렁주렁 흉하게 달려 있을 수 없다. 무시무시한 책망과 징계의 계획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를 리 없다. 그 누구도 환한 태양빛을 보며 ‘날씨가 정말 흉흉해’ 또는 ‘아휴, 기분 되게 나쁜 날이네’ 라고 말하지 않듯이!

▲ 체팔루 대성당의 예수그리스도. 1130년.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 “예수님!” 하고 달려가 죄를 회개하고 나를 맡기면 언제든 환하게 웃으시면 안아주신다. 새벽이나 깊은 밤 중이면 더 좋아하시는 것 같다. 단 둘이 은밀하게 만날 수 있어서일까? 주님의 이런 얼굴빛을 날마다 마주하며 산다면 무슨 근심 있으리요!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주님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하고, 눈물까지 흘리게 하며, 심지어는 아예 얼굴을 외면하게 만든다. 아니, 우리가 자청해서 피해 버리기도 한다.

그리고는 세상의 온갖 번쩍 번쩍 빛나는 얼굴들을 향해 달려가 갖은 아양을 부리고, 세상 사랑을 얻기 위해 교태도 부린다. 하지만 세상은 철저한 ‘주고받기식’ 사랑이다. 아니 이제 세상은 내가 준만큼의 반의 반도 안 주려하고 더 바치라고 한다.

결국은 만신창이가 되어 주님 앞에 오지만 주님의 슬픈 뒷모습만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울부짖는다.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새번역은 좀 더 절절하게 표현한다.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우리가 구원을 받도록,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그런데, 지금 당신 얼굴빛은 어떠한가? 사람을 살리는 얼굴빛인가? 아니면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을 무참하게 주저앉게 하는 돌덩어리처럼 무정한 얼굴인가?

 

함께 기도

나님! 우리 때문에 환하게 웃으신 적이 도대체 몇 번이나 되시는지요? 또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나의 얼굴 때문에 얼마나 살아나고, 얼마나 꺾이는지요? 분칠하는 얼굴이 아니라 예수님의 빛을 받아 다시 빛을 내는 은총의 얼굴빛이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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