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재판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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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재판의 배경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2.2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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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종교재판(1)

중세 시대의 폭력과 잔혹성, 무자비함, 교회의 타락, 혹은 비이성주의를 보여주는 또 한 가지 예가 교회에 의해 자행된 종교재판이었습니다. 이단심문(異端審問)이라고도 하는 종교재판은 로마 가톨릭이 반론을 제기하는 매우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서설 부문에서는 공신력이 있는 두산백과사전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집니다. 종교재판이란 단순한 ‘재판’이 아니라 이단자의 탐색 ·적발 ·체포 ·재판 ·처벌을 포함하는 이단자 박멸을 위한 일체의 활동을 그 임무로 하였습니다. 

이단자에 대한 탄압은 4세기 기독교가 정착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 교회의 태도는 그래도 관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그 태도가 경직되기 시작하였지요. 그것은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이단운동이 교회에 준 심각한 위기감 때문이었습니다.

그 심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국가(지리적으로는 서유럽 전역과 그 속령)에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이 가지고 있는 지위를 알아야 합니다. 요컨대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세계적 ·보편적이라는 뜻)’이라는 호칭대로 세계교회이며, 그 수장(首長)인 로마 교황은 서유럽 각국을 지배하는 서유럽의 원수(元首)이고, 교황청은 세계의 정부라고 주장했습니다. 

남프랑스의 이단운동이 세계정부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 하는 혁명운동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 당국이 받았던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로마 교황은 일종의 십자군을 결성해서 20년에 걸친 이단자 박멸전쟁을 일으켜 어렵게 진압하였으나, 사후 대비책으로서 이단박멸 강화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통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단자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는 데 충분한 학식과 종교적 열의를 가진 적격자를, 교황대리로서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 권한을 부여하여 전 기독교국가에 파견하여, 전적으로 ‘이단 사냥’에 종사시키는 전문적이고도 항구적인 조직을 만들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233년 4월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교황교서로서 이를 발표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를 ‘이단 심문관’에 선임하였습니다. 이같이 해서 제도화된 종교재판의 조직은 이단 심문관이 파견됨에 따라 전 기독교 국가에 퍼졌으며, 특히 스페인에서의 종교재판 활동은 스페인 국왕의 적극적인 영합에 힘입어 가혹의 극을 이루었습니다. 종교재판 방법은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체 허용되지 않고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으며, 밀고는 비록 친자식 형제 사이의 것이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또한 다종다양하고 처절한 고문에 의해 자백이 강요되거나 날조되어, 용의자는 반드시 유죄판결과 처형으로 귀착되도록 짜여졌던 암흑재판이었습니다. 이단탄압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종교재판은 각국의 국왕 ·영주(領主) ·지방자치단체 등의 세속적인 재판으로도 행해졌습니다. 

한편, 2004년 6월 교황청은 약 800쪽에 달하는 중세종교재판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교황청은 중세종교재판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극악무도하거나 수만 명의 사람들을 화형에 처했다는 점 등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주도되었고, 공적인 사죄를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견해를 반영한 것일뿐 기존의 주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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