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인문주의자들
상태바
독일의 인문주의자들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8.02.07 16: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4. 르네상스와 인문주의(5)

독일의 인문주의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는데, 아그리꼴라(1494~1566)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인문주의자이자 종교 개혁자였는데, 1494년 아이스레벤에서 출생하였고 비텐베르그에서 루터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1519년 라이프찌히 논쟁 때 루터의 기록 보좌관이었는데, 1527년에는 회개와 믿음의 관계에 대하여 멜란히톤과 논쟁하였습니다.

로이힐린(1455~1522)은 위대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고전어를 배웠는데, 라틴어와 헬라어의 대가였으며 특히 히브리어에 저명한 학자로서 히브리어 연구의 아버지로서 불립니다. 또 라틴어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으며, 20년간의 노력으로 1506년 히브리어 문법과 어휘집을 편찬했는데, 이런 종류의 책으로는 첫 저술이었습니다. 그는 이런 책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종교재판을 받았는데 그의 재판은 6년간 계속되었습니다. 후에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하여 성경원문 연구에 기여하였습니다. 

멜란히톤(1497~1560)은 인문주의자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독일 남부 브레텐에서 태어난 멜란히톤은 하이델베르그, 튀빙겐, 비텐베르그에서 수학하였고,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저술한 헬라어 문법책은 18세기까지 헬라어 문법의 정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또한, 스콜라 철학에 바탕을 둔 교육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기존 교육체계의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교육헌장을 만들어 독일의 초등교육부터 대학교육까지의 교육체계를 확립함으로써 ‘독일의 스승’이라는 별칭을 얻게 됩니다. 그는 루터와 함께 라이프찌히 논쟁에 참가하는 등 마틴 루터의 중요한 조력자였습니다.

폰 훗텐(1488~1523)은 인문주의자로서 시인이자 기사(騎士)였습니다. 독설가이기도 했던 그는 기독교의 진정한 적은 터키가 아니고 로마에 있는 ‘지옥의 개’(교황을 지칭)라고 했습니다. 루터와 동시대인이었던 그는 교황권을 신랄하게 비평했습니다. 그는 세 가지가 로마에서 팔리고 있는데, 예수, 사제직, 여자가 그것이고, 세 가지가 로마에서 미움 받고 있는데, 교회회의, 교회개혁, 독일인의 개인이 그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에라스무스(1467~1536)는 화란 노틀담에서 신부의 사생아로 출생했습니다. 그는 화란의 ‘공동생활형제단’에서 영향을 받았고, 후에 파리대학에서 수학했습니다. 캠브리지에서 헬라어와 신약학 교수로 일한 바도 있는 그는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찬하였습니다. 1517년에는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전권을 의역하기도 했습니다. ‘인문주의의 왕자’로 불릴 만큼 박식했던 그는 152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루터를 대항하는 글을 쓸 것을 제안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그 요청으로 쓴 책이 ‘자유의지에 관한 논의’였으며, 이 책에 대한 루터의 응답이 ‘의지의 노예’였습니다.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떠났으나 그는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가 강조했던 이신득의보다는 자유의지로 인간답게 사는 도덕적 이상을 기독교의 본질로 가르쳤습니다. 그는 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알고 있었으나, 교회 개혁에 대한 의지는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신플라톤주의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현세적인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