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예배함이 곧 전도, “밥 한 그릇에 예수 팔지 맙시다”
상태바
삶으로 예배함이 곧 전도, “밥 한 그릇에 예수 팔지 맙시다”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8.02.01 13: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간 30주년 특별기획]30살 동갑내기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

거리는 갈 곳 없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혹독한 칼바람이 몰아칠 때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방 한 켠, 밥 한 끼면 살았을 생명들은 마른 낙엽처럼 힘없이 떨어졌다. 거리에 남은 수만 명의 사람들 역시 바람 앞에 촛불처럼 꺼져가는 불씨를 위태롭게 부여잡고 있었다. 불과 30년 전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의 모습이다.

국가도 거리의 죽어가는 이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올림픽을 치르고 이제 선진국이라 떵떵거렸지만 사회복지에 관한 한 영락없는 후진국이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존엄성은 너무나도 쉽게 짓밟혔다.

32살의 최일도 목사는 독일 유학을 꿈꾸던 평범한 신대원생이었다. 휴강 소식에 휘파람을 불며 청량리를 지나던 길, 눈앞에서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기차를 놓칠까 애써 외면하며 광장을 지나쳤다. 누군가는 도와주리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늦은 밤 다시 돌아온 청량리 광장에 그 노인은 온 몸을 쭈그린 채 그대로 쓰러져있었다.

마지막 남은 신앙양심으로 쓰러져가던 할아버지에게 설렁탕을 사드린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그날로 매일 청량리역 광장에 퍼질러 앉아 노숙인들과 라면을 끓여 먹었다. 꿈꾸던 아름다운 숲속의 전원교회와 독일휴학 계획을 모두 내려놨다. 88년 11월, 다일공동체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렇게 밥을 나누고 생명을 살린 일이 어언 30년, 창간 30주년을 맞은 기독교연합신문이 동갑내기 다일공동체를 찾았다. 교회도, 목사도, 성도도 변하고 ‘개독교’란 비난을 얻어맞는 요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낮은 자리를 지키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를 만나 30년 사역의 이야기를 들었다.

▲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는 인터뷰 내내 '나사렛 예수의 영성'을 힘주어 말했다.

절망을 딛고, “다시 한 번 일어섭시다”
다일공동체. 이제는 대통령 후보들도 거쳐 가는 봉사단체로 워낙 잘 알려진 터라 꽤나 익숙한 이름이다. 하지만 정작 이름의 뜻은 알지 못했다. 다른 기독교단체에서처럼 성경에서 뜻을 유추해내기도 어려웠다. 밥퍼 유니폼에 앞치마를 걸친 채 수수한 모습으로 인터뷰에 나선 최일도 목사에게 가장 먼저 다일의 뜻을 물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체, 일치 속에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달라졌어요. 98년 외환위기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지요. 우리는 늘 그래왔듯 거리의 사람들에게 밥을 먹였습니다. 그들이 나중에 찾아와 ‘다시 일어서게 해줘서 고맙다’고 하더군요. 그때부터 다일공동체는 ‘다시 한 번 일어서자’는 뜻으로 통용되고 있죠. 시민들이 붙여준 소중한 의미입니다. 그때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일의 참 뜻은 이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민들이 직접 붙여준 ‘다시 한 번 일어서자’는 풀이는 다일공동체에게 더 각별하다. 특히 다일을 통해 실제로 다시 일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최 목사에게 가장 큰 보람이다. 17년 동안 다일공동체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자립하고 12년째 봉사자로 섬기는 이도 있다.

1988년 서울, 노숙인들은 마치 전쟁 직후의 모습이었다. 매년 수천 명의 노숙인이 거리에서 얼어 죽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은 기댈 곳이 없었다. 그들에게 라면 한 끼, 밥 한 끼는 한 숨의 생명이었다. 30년 전 시작된 밥 한 끼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 30년 전 청량리 거리의 풍경. 젊은 시절의 최일도 목사가 노숙인들의 손을 잡고 기도하고 있다.(좌측) 다일공동체의 밥 한 끼, 라면 한 그릇은 노숙인들에게 한 줌의 생명이었다. (사진제공:다일공동체)

어느새 밥퍼 나눔은 1,000만 그릇을 훌쩍 넘어섰다.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아 계산기를 두들겼다. 4인 가족이 매일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다 해도 2천5백년이 걸리는 양이다. 30년 동안 끊이지 않은 사역이 새삼 존경스럽지만 달리 생각하면 거리에서 굶는 사람들 역시 끊이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때와 지금의 거리 풍경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굶어죽는 사람은 많이 줄었어요. 도우려는 단체도 많아졌고요. 그렇다고 살기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제는 도시 한 가운데서 고독한 노인들이 죽어갑니다. 시체 썩은 냄새가 지붕을 넘어 코를 찌를 때까지 이웃들도 사람이 죽은 줄 몰라요. 자살률 1위, 이혼율 1위, 저출산율 1위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배고픈 시절보다 더 서로 물어뜯고 대립하고 편을 가르지요. 풍요가 있으면 뭐합니까. 영혼이 상하고 병든 것은 배가 주린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에요.”

배는 불렀으나 영혼이 병든 시대다. 외로움과 우울증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다일공동체는 이제 밥상을 넘어 전인적 구제로 사역 범위를 넓혔다. 밥퍼에서 일단 배고픈 이들에게 밥을 먹이면 꿈퍼 사역을 통해 기초교육을 실시한다. 영성공동체에서는 영혼을 살린다.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개신교 최초이자 유일의 무료병원, 다일천사병원이다.

전국에서 운영되는 무료 병원은 모두 세 곳. 원래 6개에 달하던 무료병원은 운영난으로 반 토막이 났다. 그 중에서도 의료보험수가 신청을 하지 않는 곳은 다일천사병원이 유일하다. 의료보험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외국인노동자들, 치료비 없는 노숙인 환자 100여 명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최 목사는 정부 지원 한 푼 안 받는 이곳이 17년째 운영되고 있다는 자체가 세워진 일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라고 고백한다.

“기존 병원에서 일을 끝낸 의료인들이 다일천사병원에 와서 봉사합니다. 그렇다보니 우리 병원의 수술은 밤과 주말에 이뤄져요. 득 되는 일 하나 없는데 자기 휴식시간을 쪼개 이곳에서 헌신하고 있지요. 이분들이야말로 이 땅위의 천사 같은 분들입니다.”

다일공동체는 이제 도움의 손길을 해외로도 뻗고 있다. 작년 말에는 해외사역을 담당하기 위한 법인 ‘데일리 다일’도 설립했다. 30주년인 올해도 3월 우간다, 6월 탄자니아, 11월 중남미 지역으로 떠난다. “30년을 자축할 여유는 없습니다.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국가들이 아직도 너무 많아요.”

예수를 따를 때 나눔·전도도 뒤따라
밥퍼 목사로, 봉사단체 대표로 잘 알려진 최일도 목사. 하지만 그는 사회봉사를 목표로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강조한다. 다일공동체에서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 나사렛 예수의 영성생활이다. 나눔과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의 열매이자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영성 훈련에 집중하기 위해 봉사와 구제는 다일복지재단에 맡기고 설곡산 다일공동체를 만들었다. 설곡산 다일공동체에서는 나사렛 예수의 영성생활에 오롯이 집중한다. 말씀대로 사는 생활을 강조했던 종교개혁가 메노, 후터의 목소리를 이어받은 것. 최 목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은 한국교회를 보며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한국교회가 바닥을 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를 극복하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데 같이 떠밀려 가버렸어요. 오히려 부추긴 면도 없지 않죠. 500년 전 종교개혁은 성경대로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자 기득권을 포기하고 거부한 저항정신이었어요. 하지만 프로테스탄트라고 자칭하는 교회는 다시 제도권이 됐습니다. 만인제사장직을 외쳤지만 지금은 목사만 갖고 있는 권한이 너무 많아요. 평신도에게 맡겨지는 일이 더욱 많아져야 합니다.”

▲ 작년 12월, 30번째 성탄 예배를 드릴 당시의 최일도 목사. 직접 봉사에 참여하는 최 목사는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다 일'한다고 해서 다일공동체라고 농담삼아 이야기한다며 웃었다.

최일도 목사가 20대 신학생이었을 때다. 평소 존경하던 대천덕 신부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신부님, 신부님’하면서 따랐다. 그랬더니 대천덕 신부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최일도 형제, 왜 나를 신부님이라고 부르나요. 아처 형제라고 부르세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최 목사 또한 ‘아처 형제’의 길을 따라 제자도를 걷고 또 걸었다. 편한 담임목사직에만 있으면 양심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다. 55세에 사임하고 퇴직금 전액을 교회에 돌려줬다. 소속 노회에서 최연소 원로목사가 됐지만 원로목사로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개척목사로, 사랑을 실천하는 작은 형제로 사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다시 본질로 돌아갈 것을 외치는 그는 삶으로 나타나는 믿음을 강조했다. 오직 믿음만 외치다보니 교회에서 행함이 사라졌다는 것.

밥퍼 현장에서는 밥을 나누며 전도하지 않는다. 간단한 식전기도만이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의식의 전부다. 왜 예배를 드리지 않냐는 수많은 비판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것은 “밥 한 그릇에 예수를 팔고 싶지 않아서”이다.

“정말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들이 먼저 물어옵니다. 예수가 얼마나 좋으면 그렇게 사냐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나도 예수를 알고 싶다고 먼저 이야기해요. 그때서야 우리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끼니를 줄 때마다 설교 하는 것이 중요한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은 복음을 눈으로 보길 원합니다. 삶으로 예배를 드려야지요. 삶으로!”

임종을 앞둔 노숙인들이 마지막을 보내는 다일작은천국 역시 따로 전도를 하지 않는다. 묵묵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섬길 뿐인데 90%가 넘는 분들이 세례를 받고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예수의 영성을 추구하면 섬김의 열매가 저절로 맺힌다는 최 목사의 말이 기억에 맴돌았다. 그는 30주년을 맞는 기독교연합신문도 영성이 살아있는 언론이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30년 전 하나님께서 기독교연합신문을 세우신 뜻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믿습니다. 시류에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는 언론이 되길 바랍니다.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에 힘없이 떠내려가지만 살아있는 연어는 쏟아지는 폭포수도 거슬러 오릅니다. 바른 신앙과 바른 언론을 위해 몸부림치는 기독교연합신문이 되길 당부드립니다. 온 맘 다해 축하하는 마음과 함께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