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걸으며 신앙 선배들 흔적 아로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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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걸으며 신앙 선배들 흔적 아로새기다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8.01.24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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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맞아 찾을 만한 서울의 기독교 성지
▲ 사적 제 275호인 스팀슨관은 연세대학교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본관과 아펜젤러관 등 192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들을 바라보노라면 옛 선배들의 자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KIATS 추천 한국기독교 성지순례 벨트 따라 걷기
연세대학교·이화여대·아현교회 등 ‘신촌벨트’ 추천

방학을 맞아 고민이 깊어지는 이들이 있다. 방학이면 많은 학부모들은 자녀가 더욱 알찬 방학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인터넷을 통해, 주변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통해 정보를 찾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정작 한국 기독교의 역사,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찾으려는 이들은 많지 않다. 부모가 앞서가며 알려주기에도 쉽지 않을 뿐더러 정보를 찾기도 계획적인 동선을 짜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학부모들에게 희소식 같은 책이 나왔다. 지난해 10월 한국고등신학연구원(원장:김재현 박사)이 펴낸 ‘한국기독교성지순례 50BELT’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의 기독교성지를 50개의 구획으로 나눠 친절하게 소개한다. 책에 등장하는 50개의 벨트 가운데 서울, 특히 방학에 자녀들과 함께 찾을 만한 성지가 많이 분포하고 있는 신촌벨트를 찾아가 봤다. 

서양 종교의 자유로운 전파가 허락되지 않은 19세기 말, 기독교는 의료와 교육 분야를 통해 한국 땅에 처음 들어왔다. 연세대학교와 이화여대로 상징되는 신촌벨트는 근대 서구교육이 한국 땅에서 어떻게 시작되고, 서양의학이 어떤 과정을 통해 태동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초기 근대 의료와 교육의 중심부에 이제 한국 땅에 갓 들어온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녀와 함께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흔적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교육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신촌 대학로에 풍성하게 자리 잡은 먹거리와 볼거리를 즐기는 것도 소소한 팁이 될 것이다.
 

선교사 흔적 남은 학문·의료의 전당

먼저 순례의 첫 행선지인 연세대학교로 향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에 위치한 연세대학교는 서양종교인 개신교가 한국 땅에 어떻게 안착되어 왔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연세’라는 이름은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병원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 연희전문학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고아원으로 시작해 1923년 연희전문학교로 토대를 갖췄다. 세브란스병원은 궁정 어의였던 알렌의 헌신으로 고종 황제가 1885년 설립한 광혜원이 훗날 제중원으로,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연세대학교가 있기까지는 중요한 기여자들이 있었는데 그중 첫 번째가 한국명 ‘원두우’.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다. 언더우드는 1885년 일본을 거쳐 4월 5일 부활주일에 인천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는 영어-한글 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번역했으며, 교회와 학교의 설립을 통해 한국 선교의 기틀을 놓았다. 

올리버 에비슨은 광혜원을 인계받아 확장했고, 1899년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 살던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1904년 병원을 신축해 세브란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제자인 김필순은 항일투사들을 치료하며 독립에 기여했고, 이밖에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우, 홍종은 등 7명의 1회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이밖에 연세대학교 캠퍼스 곳곳에는 한국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919년 착공해 1920년에 준공한 스팀슨관은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 졌다. 사적 제275호로 등록돼 있으며, 연세대학교 최초의 석조건물로 2층으로 이뤄져 있다. 연희전문학교의 본관 건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대학원과 대외협력처가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세워진 언더우드 동상이 인상적이다. 이밖에 사적 제277호인 아펜젤러관과 언더우드와 그의 자녀들이 살던 집을 개조한 언더우드가 기념관, 윤동주 시인이 살던 생활관을 개조한 ‘핀슨홀-윤동주 기념관’ 등도 꼭 가볼만한 곳으로 꼽힌다.
스팀슨관을 시작으로 본관-아펜젤러관-언더우드가 기념관-윤동주 기념관-광혜원-동은의학박물관 등을 순서로 캠퍼스를 돌아보면 도보로 1시간 가량이 소모된다. 

▲ 등록문화재 제14호인 이화여대 본관은 파이퍼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미국인 파이퍼 여사를 기념해 이름을 지었다. 건물 전면 위편에 자리한 십자가가 인상적이다.

꽃처럼 희고 아름다운 최초 여성교육기관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나와 연세교차로에서 세브란스병원을 좌측으로 끼고 돌아 5분가량 걸으면 두 번째 행선지인 이화여자대학교(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 후문이 나온다.

1886년 5월 31일 미국 감리교 메리 스크랜튼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이화여자대학교는 국내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이화’라는 이름은 학교가 세워진 이듬해인 1887년에 명성황후에 의해 지어졌는데, “배꽃처럼 희고 아름답다”는 뜻이다. 학교는 처음에는 정동에 위치했다가 193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본관인 파이퍼홀은 등록문화재 제14호이며 신촌 캠퍼스에 처음 세워진 건물이다. 학교 이전에 필요한 비용을 후원했던 미국인 파이퍼 여사를 기념해 이름을 지었다. 1935년 완공된 후 6.25전쟁 전까지 모든 학생이 이 곳에서 수업을 받았다. 

건물 전면 위편에 보이는 십자가 조각물이 퍽 인상 깊었다. 3층 정중앙에 위치한 ‘애다기도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화여대의 비밀 공간이다. 누구나 이곳에서 기도하고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 고전적인 느낌의 샹들리에와 나무로 된 장의자, 창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본관을 나와 고개를 돌리면 1935년 완공된 뒤 음대건물로 사용됐던 케이스홀이 보인다. 현재는 대학원관으로 쓰이는 이 건물 내부에는 500석 규모의 중강당 에머슨 채플이 자리하고 있다. 함석지붕으로 지어진 석조건물로서 이 건물의 건축 기금을 댔던 에머슨 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건물 앞 계단에 앉으면 학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전적인 건물을 구경하는 것 못지않게 세계적인 건축가 페로가 설계한 지하복합단지 캠퍼스를 돌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야외에서 얼었던 몸을 녹이기에도 좋은 아기자기한 공간이 많다. 학업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기본.

▲ 메리스크랜튼 선교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은 단연 메리 스크랜튼 대부인이다. 그녀는 한국여성들의 계몽과 교육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로 잘 알려져 있다. 남편을 잃고 아들 스크랜튼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 온 그녀는 여성들만으로 교회를 시작해 1889년 2월 한국 최초의 여성교회를 조직했고, 상동교회 내 공옥여학교, 시흥의 무지내여학교, 수원의 삼일학교 등을 설립했다. 

‘여성교육의 어머니’라 불린 그녀는 75세까지 열정적으로 일하다 1909년 10월 8일 소천해 양화진에 묻혔다. 그녀의 묘지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를 뿌렸기 때문”이라고 쓰였다.

▲ KIATS가 엮은 '한국기독교선지순례50BELT'는 한국의 기독교 성지를 50개의 벨트로 정리해 소개한다. 지구촌교회 원로 이동원 목사는 "이 책을 들고 이 땅의 주의 백성들이 주께서 이 땅에 행하신 일들을 답사한다면 그것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부흥의 단초가 될 것"이라고 추천사를 전했다.

한국교회의 어머니 교회들

신촌벨트에는 한국교회의 어머니격인 오래된 교회가 많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로 293에 위치한 아현감리교회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아들인 윌리암 스크랜튼 선교사가 1888년 12월 서대문 밖 애오개 지역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시약소 형태의 의료활동을 하면서 시작됐다. 아현동 지역은 조선 시대 당시 애오개 골짜기로 불리며 병든 사람을 버리거나 죽은 아이들을 묻는 곳이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으로 시작된 이 시약소는 1890년 폐쇄되지만, 애오개 지역의 선교는 계속됐다. 선교사 올린저와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노블 부부의 헌신으로 마침내 기도처 형태의 아현교회가 시작된다. 

아현교회 마당으로 나오니 스크랜튼 선교사의 흉상과 6.25전쟁 당시 성도들을 피난시키고 자신은 납북된 조상문 목사의 기념비가 보인다. 아현교회 3대 담임이던 조 목사는 일제의 잔재였던 해방 후의 교회재산을 정리했을 뿐 아니라 행정에 능했으며, 심방과 개인전도에 대한 열심이 대단하여 교회를 빠르게 성장시켰다. 부임 1년이 못되어 의자를 새로 구입해야 할 정도였는데 때마침 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산당 정치보위부에 의해 살해됐다.

인근의 아현성결교회(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로 331) 역시 설립된 지 100년이 넘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다. 한국의 성결교회는 1907년 동경성서학원을 수료한 정빈과 김상준이 서울 종로 염동에 복음전도관을 세우면서 시작됐다.

1911년부터는 서울 무교동에 현재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을 개교하여 성결교 지도자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이후 현재 아현성결교회가 자리한 충정로 3가 일대에 성서학원을 신축해 이전했고, 1913년 강시영, 김석준이 주도하여 강당교회를 설립한 것이 아현성결교회의 시작이 됐다. 

현재 남아있는 아현성결교회 옛 예배당은 1955년에 건축된 2층 석조건물로 2013년에 ‘100주년 성전’을 신축한 이후 리모델링하여 각종 행사와 교제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구 경성성서학원 건물이 100주년 성전 건축으로 철거된 것은 아쉽다. 1921년 세워진 경성성서학원은 5층짜리 붉은 벽돌로 건축되어 당시 명동성당, YMCA 건물과 함께 서울의 3대 건축물로 뽑힐 정도로 가치가 높은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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