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와 민족의 은인을 우리는 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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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민족의 은인을 우리는 잊었습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8.01.1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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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자 ‘알렉산더 피터스’미국 LA 인근 공동묘지서 묘소 방치된 채 발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애송하는 시편 23편은 1898년 처음 우리말로 번역됐다. 아름다운 언어와 운율의 시편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도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누구일까. 120년 전 이처럼 회화적 번역이 가능했던 당대 인물은 누구일까. 신약성경은 존 로스 선교사가 중국에서 번역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편을 포함해 구약성경을 처음 한글로 번역한 인물을 아는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은 많지 않다. 

알렉산더 알퍼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목사. 찬송가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75장 ‘주여 우리 무리를’의 작사가로 찬송가에는 ‘피득’이라는 한국명이 기록돼 있다. 왜 구약성경을 번역했던 피터스 목사가 한국교회에게서 잊혀 졌는지 아직까지 밝혀진 이유는 없다. 그보다 한국교회의 무관심, 더 세게 말하면 은혜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 LA 인근 패서디나 소재 마운틴뷰 공동묘지에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잔디와 잡초로 뒤덮인 채 방치돼 있다. 같은 묘지 아르메나아어 성경 번역자의 묘소와 매우 대조적이다. 사진제공=박준서 교수

지난해 피터스 목사의 묘지가 미국에서 발견됐다. 구약학자 박준서 교수(연세대 명예교수)가 풀러신학교 초빙교수로 머무는 동안 수소문 끝에 LA 인근 패서디나(Pasadena) 지역 공동묘지에서 그를 찾아낸 것이다. 묘비도 없이 마치 무연고자 묘지처럼 방치돼 있는 책임은 한국교회에게 있다. 지난 15일 피터스 목사의 묘지를 발견한 박준서 교수를 만나 피터스 목사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와 현재 추진되고 있는 기념사업 과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구약성경 번역한 피터스 목사는 누구?
우리나라에서 46년간이나 활동한 피터스 목사는 1958년 패서디나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에서 여생을 마쳤지만 그는 본래 러시아 사람이었다.

1871년 제정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짜르’가 지배하던 19세기말 러시아에서 삶은 피폐했고 유대인에 대한 강한 배척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 홀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 교수는 아마 미국으로 이주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데 그가 유대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 1895년 24세 나이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박 교수는 러시아인이 일본까지 와서 예수를 믿고 조선에 와 한글 성경을 번역한다는 드라마틱한 개인사가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의 설명대로 희박한 가능성의 연속이다. 더구나 피터스 목사는 조선말을 배운지 불과 3년 만에 시편을 번역한 언어천재였다. 구약의 언어 히브리어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생각해 봅시다. 제정 러시아에서 살던 정통파 유대인이 어떻게 일본에 와서 미국성서공회 총무에게 세례를 받았어요. 히브리어를 잘 아는 유대인 청년이 신앙을 갖게 됐고, 세례를 준 사람의 이름을 따라 피터스로 개명해 미국성서공회 소속 권서로 조선에 옵니다. 그리고 3년간 한국어를 배워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구약성경 한글번역본 ‘시편촬요’를 번역합니다. 이 모든 시퀀스를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요.”

당시 조선에 있던 선교사들은 성경번역위원회를 만들고, 피터스 목사를 미국의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신학교육을 마친 그는 구약성경 발간을 위해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1911년 최초의 한글번역 구약성경전서 ‘구약젼서’를 발간하고 1938년 ‘개역구약성경’까지 발행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 연세대 박준서 명예교수는 작년 7월 귀국 직후부터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을 위해 뛰고 있다. 더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관심을 갖고 동참해 주길 박준서 교수는 호소했다.

버려진 묘지의 주인공 ‘피터스’
“패서디나에서 여생을 마친 것을 알고 있어서 참배라도 하려고 목사님들에게 피터스 목사님 묘지를 아냐고 물으면 첫째는 그분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LA 인근에 한인교회가 1500여개가 넘는데 아는 분이 없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한명도 만나지 못해 수소문해 찾아낸 것이지요.”

피터스 목사의 묘지는 평장이었고, 작은 묘비마저 잔디로 뒤덮여 있었다. 그것도 공동묘지 구석진 자리에 무연고자 묘지로 방치돼 있었다. 박 교수는 맨손으로 잔디를 걷어내고, 물을 길어와 묘비를 닦아 글자가 보이도록 했다. 묘비에는 목사(Rev.)라는 호칭도 없었다.

같은 공동묘지 안에 아르메니아어 성경을 번역한 인물의 묘지는 정식 기념비를 세워져 기리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피터스 목사는 미국 신학교 동문 ‘엘리자베스 캠벨’과 결혼해 다시 조선에 왔지만, 4년 만에 폐결핵으로 아내를 양화진에 묻었다. 의료선교사 ‘에바 필드’와 재혼해 두 아들을 얻었지만, 암으로 역시 아내를 양화진에 묻었다. 

이런 그를, 다시 말하지만 한국교회는 잊었다. 박준서 교수는 신앙인이기에 앞서 한국교회가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피터스 목사님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준 분입니다. 한국교회뿐 아니라 민족의 은인입니다. 500년전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 책에서 피터스 목사에 대해서는 몇 줄 설명에 그치고 지나가 버립니다. 한국교회가 축복성회만 하면 무얼 하겠습니까. 최소한의 도리를 다해야 하나님께서도 복주십니다.”

박준서 교수는 지난해 7월 입국하자마자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노령의 스승이 하는 일에 제자들이 동참했고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이제 그 일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박 교수는 피터스 목사에 대한 본격 연구작업에도 착수했다. 피터스 목사는 르우벤 프럼킨(Reuben Frumkin)이라는 유대식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사실을 이번 인터뷰에서 처음 공개했다. 박 교수는 왜 피터스 목사가 조명되지 못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준비 중이다.

기념사업, 한국교회가 함께해야 합니다
“기념사업을 하려고 하니 반 농담으로 구약학 교수님이 가르쳐주지 않아서 몰랐다고 해요. 그래서 내 책임이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책임으로 존 로스 목사님 수준으로 피터스 목사님에 대해 알려야겠다는 각오입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우선 후손을 찾아야 한다. 두 아들 중 장남은 1950년도에 사망했고, 둘째 아들은 생존해도 90세를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적으로 기념비를 만들려고 하더라도 남은 후손들이 허락해야 가능하다.

일부에서는 2명의 아내가 묻힌 양화진으로 이장하자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역시 후손의 승낙이 있어야 한다. 박 교수는 피터스 목사의 후손이라는 제보를 받아 접촉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선교사의 후손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제보들이 계속 이뤄져야 새 가능성도 찾을 수 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재정적 뒷받침도 중요하다. 올 상반기에는 장신대 총장을 지낸 김중은 박사가 피터스 목사에 대한 전기를 출간한다. 김중은 박사가 소장하고 있는 ‘시편촬요’ 본도 영인본으로 만들 계획이다. ‘피터스목사성경연구원’을 만들고, 전국의 신학교를 순회하며 피터스 목사 기념강좌를 여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이미 미국 풀러신학교가 기념강좌를 제안했다. 

미국 공동묘지에 기념비와 전시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 10만불이 소요될 예정이지만, 박준서 교수 개인의 힘으로는 쉽지 않다. 피터스 목사를 기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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