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 모범의 또 다른 축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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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모범의 또 다른 축 ‘여성’
  • 정하라 기자
  • 승인 2017.12.14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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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⑭ 3인의 여성 종교개혁가들

지금까지 우리가 접해온 종교개혁사의 주인공은 대부분이 남성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역사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비단 남성 개혁가들이 일궈낸 노력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기를 거치며, 제도적이고 종교적인 억압에 더한 성적 억압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옹호하고 개혁운동에 당당히 헌신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틴 루터가 주창한 ‘만인사제주의’가 지향한 영적 평등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포함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독일 종교개혁 도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성직자의 아내라는 위치는 여성 지위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었으며, 전체 여성의 위상 고양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비텐베르크의 샛별’ 카타리나 폰 보라

▲ 카타리나 폰 보라(Katherine Von Bora, 1499-1552)

로마 가톨릭의 전성기인 중세시대 교회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억압은 여전했다. 이런 때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여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함께 부부관계와 결혼관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을 더 이상 죄악시하지 않았으며, 사제들에게도 결혼을 적극 권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525년 시토수녀회 소속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Katherine Von Bora, 1499-1552)가 26세의 나이로 당시 42세의 루터와 결혼했다. 폰 보라는 탁월한 아내로 루터를 보좌하며 종교개혁에 큰 공헌을 했다. 폰 보라는 1499년 라이프치히 근교 리펜도로프에 영지를 둔 역사 깊은 보라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대여섯살이 되던 해에 베네딕투스수녀원에 보내졌으며 4~5년 후 님프센에 있는 마리엔트론 시토회수녀원에서 16살이 되던 해에 일 년의 수련기간을 거쳐 수녀가 됐다. 

이곳에서 라틴어를 배운 그는 뛰어난 독해력을 바탕으로 루터의 저작을 직접 읽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에 정통하게 됐으며, 수녀원에서의 탈출을 감행하게 된다. 1523년 4월 4일 부활절 밤에 루터의 계획에 따라 12명의 수녀들은 시의원이자 상인인 코프와 함께 마리엔트론 수녀원에서 탈출을 감행했다. 당시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은 수녀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했던 것으로 보인다.

12명의 수녀 중 마지막으로 남겨진 폰 보라와 루터가 1525년 6월 13일 결혼서약을 한 것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두 사람이 어떻게 결혼했던지 간에 카타리나는 루터의 곁에서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충실한 역할을 수행하며 프로테스탄트 여성의 모범이 됐다는 사실이다. 

루터는 아내 폰 보라를 “비텐베르크의 샛별”로 칭할 정도로 탁월한 아내로 인정했다. 그는 종교인사들 중 한사람의 배우자로서 활약했을 뿐 아니라 여성을 저명한 목회자요 개혁자의 동역자로서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 일선에서 서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교회의 어머니’ 카타리나 젤

▲ 카타리나 젤(Katharina Zell, 1497/8~1562)

카타리나 젤(Katharina Zell, 1497/8~1562)은 비범한 16세기 여성이자 흥미로운 종교개혁자로 알려져 있다. 마태우스 젤(Matthias Zell)의 아내로 루터보다 2년 앞서 전직 사제와 결혼했다. 그는 목회자의 아내라는 부르심 앞에 가정에서만 종교개혁을 지원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확장시켜 활동하고 남성과 동등한 위치의 목회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스트라스부르의 부유하고 좋은 장인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 성구집과 루터의 1522년 신약성서 번역본과 다른 저작들을 연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설교를 들으면서 회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교구민으로서 그의 남편 마태우스 젤을 만나게 됐지만, 점차 그의 해방의 복음에 대한 설교에 호의를 품게 됐으며 루터의 주례로 1523년 12월 3일 결혼식을 올렸다. 카타라나는 결혼생활을 통해 남편의 지지에 더욱 힘입어 계속적인 신학적 발전과 성숙을 이뤘으며,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찬송가집, 성서 해설서 등의 다양한 책자를 저술했다.

당시 여자가 공적으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당시 스트라스부르시의회의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마태우스는 아내 카타리나의 활동을 제재하지 않았으며, 말과 글로 주체적인 신앙을 키울 수 있도록 도왔다. 1562년 마지막 임종을 받을 때까지 카타리나는 개혁파여성으로 복음을 믿고 행하며 따르는 삶을 살았다.

‘종교개혁의 숨은 영웅’ 마리 당티에르  

▲마리 당티에르(Marie Dentière, 1495∼1561)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 과감하고 열정적인 인물은 마리 당티에르(Marie Dentière, 1495∼1561)였다. 제네바의 개혁자이자 저술가였던 당티에르는 남성에 가려진 종교개혁의 숨은 영웅으로 불린다. 그는 루터의 부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해 수도원의 독신생활을 떠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책을 썼으며, 칼뱅의 세력권 안에서 종교개혁을 위한 의욕적 대변자가 됐다.
 
마리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1521년 투르나이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에 들어가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루터의 글에 매료돼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 회심한 후 1524년 무렵 이곳을 떠났다. 스트라스부르는 마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중간 체류지로 마틴 부처나 장 칼뱅과 같은 핵심적인 종교개혁자들과 저명한 목회자들을 필두로 그 지역의 유력인사들과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을 제공했다.

마리는 교회에서 여성이 목회적인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성서 속 강한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며 여성이 약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대항했다. 또한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을 가지고 여성의 본성과 권리에 대한 오랜 논쟁에 기여하기도 했다. 단지 사적인 영역에서의 영적인 동등성에 대해 만족하는 것을 넘어서 자유와 정의 그리고 여성의 신학적 역할이라는 이슈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논증했다. 

그의 종교개혁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여성의 권리에 대한 논리적 반박은 많은 남성 종교인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만들기도 했다. 특히 제네바에서 함께 활동한 종교개혁가인 칼뱅이나 파렐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마리를 비방하는 근거는 반드시 신학적인 것보다 그의 강한 개성과 성품에서 야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마리의 몇몇 작품에서는 그가 여성들을 위한 문학교육과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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