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의 고통도 막지 못한 아프간 향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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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의 고통도 막지 못한 아프간 향한 사랑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12.11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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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서 아프간 난민 돕던 유바울 선교사 지난 6일 별세
"증오는 전혀 없어요. 그저 보면 돕고싶고 사랑스럽고..."
▲ 지난 6일 별세한 유바울 선교사는 10년 아프간 피랍의 고통을 이겨내고, 그리스에서 아프간 난민들을 섬기는 사역을 펼쳤다. 증오을 넘어 사랑으로 치유자의 삶을 살았던 유 선교사의 유산은 한국교회의 몫이 됐다. 사진=뉴스트리 제공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증오는 전혀 없어요.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당했고, 실제 우리 대원 중 2명이나 살해를 당했지만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그저 보면 도와주고 싶고 사랑스럽고….”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극단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에 납치됐던 유바울(당시 유경식) 선교사는 생애 마지막까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살다 하나님 품에 안겼다.

피랍됐던 분당샘물교회 23명 중 한명이었던 유 선교사는 2011년부터 그리스를 처음 찾았다가 아프간 난민들을 돕는 사역을 시작했다. 2014년 정식 파송을 받고 사역하던 중 최근 선교 보고를 위해 고국을 방문했지만, 지난 6일 경기도 성남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향년 66세 일기로 별세했다.

그간 유 선교사의 사역은 좀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지난 7월 인터넷매체 '뉴스트리'가 그리스 현지에서 창간기념 인터뷰를 했던 내용이 갑작스럽게 떠난 그의 마지막 유언처럼 남았다. 

인터뷰 영상에는 유 선교사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실 유 선교사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상처가 워낙 깊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갈기갈기 찢을 듯이 달려들어 쏟아낸 비난에 더욱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그에게 아프간은 생각도 하기 싫은 땅이었을 수 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비판을 받고 사죄해야 하지만 사실이 아닌 많은 것들이 잘못 전달됐는데 그것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솔직한 그의 고백이었다. 실제 그랬다. 무슬림 국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민소매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다녔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아프기나스탄 칸다하르에서 병원을 하던 의사 선교사들을 돕고 격려하기 위해 떠났던 길이었다.

부주의했던 부분을 지적할 순 있다. 하지만 세간에 보도된 것처럼 여행하듯 떠난 길이 아니었다. 아프간 방문을 위해 현지문화를 배우고 복장까지 갖췄다. 여성들은 극단 무슬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눈만 보이는 의상을 입었고 남성들은 수염을 길렀다. 현지 선교사들과 협력도 원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세금을 내서 피랍자들을 살려내지 말라"는 극단적 이야기들을 쏟았다. 훗날 알려졌지만, 당시 납치범들과의 협상비 대부분은 국고가 아닌 샘물교회가 부담했다. 교회는 논란을 우려해 비난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경과야 어찌됐건 같은 국민이 납치돼 목숨을 위협받을 때 사람들은 돈 걱정부터 했다. 유 선교사는 그 충격은 이룰 말할 수 없었지만 다시 아프간을 만나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2011년 그리스에 아프간 난민들이 엄청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몇몇 의사와 간호사님들과 함께 봉사팀을 꾸려 갔습니다. 난민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어요. 40여일 아프간에서 붙잡혀 있었던 시간, 소망도 없이 살아가던 그 사람들이 자꾸 모습이 떠올라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 생전 유바울 선교사가 그리스 시내 거리를 다니며 아프간 난민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다. 난민들은 아프간 말을 하는 유 선교사가 신기하면서도 지원을 자처하는 노력에 감사해했다. 사진=뉴스트리 제공

그리스 경제위기 속 난민들의 고통이 엄청났고 반감도 커갔던 시기. 그것이 계기가 됐고, 이미 난민들 10여명이 열어온 기도모임과 닿아 예배도 시작했다. 2014년그는 정식 선교사로 그리스에 파송됐고 2015년 7월 19일 첫 예배 후 2년만에 건물을 얻어 '아가페 센터'의 문을 열었다. 

아가페 센터는 난민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다. 유 선교사가 매일 거리를 다니며 만난 아프간 난민들이 숨을 쉴 수 있는 터전으로 인도되는 곳이다. 그리고 원하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것도 아가페 센터의 특징이다. 

공교롭게도 아가페 센터가 문을 연 날은 아프간에서 피랍됐던 7월 19일과 같은 날이기도 했다. 뗄 수 없는 인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나그네니까 난민들은 잠잘 곳, 먹을 곳이 필요하고 도와주고 의지할 데가 필요했습니다. 교회는 난민들이 쉬고 식사하고 옷을 빨아입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분들이 난민으로 인정받아 일자리를 얻는 것입니다."

정식 난민으로 인정받는 것도 일자리를 얻는 것도 녹록치 않지만, 유 선교사는 언제가 될 지 모를 그 때를 위해 그리스어와 영어를 가르치고 직업교육을 추진했다. 그가 숨지면서 그 사역이 누가 이어갈 지, 어떻게 전개될지 하나님만 아시게 됐다. 

하지만 유 선교사가 남긴 아프간 난민들을 위한 말들은 무겁게 다가온다. 생전 그는 이들 난민들을 돕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기회라고 했다. 

“우리가 조금만 사랑을 전해도 난민들은 마음을 열어 줍니다. 한국교회가 정말 관심을 갖고 노력한다면 난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도해주시고 관심과 공헌하고 싶으면 와서 함께해 주십시오.”

증오를 대신한 유바울 선교사의 사랑은 그가 하나님 품에 안긴 지금 우리의 사명으로 가져와야 할 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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