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바벨론 유수와 대분열
상태바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와 대분열
  • 황의봉 목사
  • 승인 2017.11.29 15: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4. 교황과 왕의 분쟁(4)
황의봉 목사의 교회사 산책

교황권을 약화시킨 다음 단계는 교황들을 론의 아비뇽으로 이주시킨 일이었습니다. 교황 클레멘트 5세(1305~1313)는 프랑스 왕 필립의 권력 아래 너무나 억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분노한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를 떠난 그는 처음에는 보르도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쁘와티에에 거주하였으며 1309년에는 아비뇽으로 이주했습니다. 이후 교황들은 1377년까지 70년 가까이 이탈리아로부터 떠나 있었는데, 이 기간을 ‘교황청의 바벨론 유수기’ 혹은 ‘아비뇽 유수기’라고도 합니다. 이 말은 시인 단테와 인문주의자 페트라카가 아비뇽 교황들을 프랑스의 포로라고 말하면서 비꼬아 한 말입니다. 
 
이 기간 동안의 교황은 모두 7명인데, 클레멘스 5세, 요한 22세, 베네딕트 12세, 클레멘스 6세, 이노센트 6세, 우르반 5세, 그레고리 11세입니다. 이 7명의 아비뇽 교황은 모두 프랑스인이었고, 이 시기에 임명된 추기경도 134명 중 111명이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이들 휘하에서 교황청은 극도로 타락하였고, 도덕적으로 문란하였으며, 종교적인 문제도 프랑스 왕의 지배를 받았을 만큼 권위가 약화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황청이 타락했던 이유는 재원(財源)의 고갈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재정이 바닥이 나자 궁여지책으로 여러 가지 부당한 징세제도 창안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조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기간에도 교황청의 사치와 낭비는 줄지 않았습니다. 또 로마교회의 재산이 이태리 귀족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 요한 22세는 각종 징세제도를 고안하여 교회적 질서를 극도로 문란케 하였습니다. 
 
교황이 장기간 떠나 있는 기간에 로마의 형편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위태로웠습니다. 로마 시민들과 기타 유력한 사람들은 교황을 되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아비뇽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 11세는 로마로 돌아오라는 성 캐더린의 권고와 로마 교황의 권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추종자들을 데리고 1377년 로마로 돌아왔으나 그 이듬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 후 프랑스인 11명, 이탈리아인 4명, 에스파니아인 1명으로 구성된 추기경단은 ‘교황청을 로마에 둘 것인가’ 아니면 ‘아비뇽에 남아 있을 것인가’하는 문제를 두고 분열하였고, 후임 교황 선거는 장기화되었습니다. 
 
가까스로 프랑스 태생의 이탈이아인 우르바누스 6세(1378-1389)가 그레고리 11세에 이어 교황이 됐으나 그는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일부, 특히 프랑스 교회 추기경과 에스파니아 추기경 13명은 4개월 뒤 아나니에서 공포 분위기에서 결정된 교황은 무효라고 선언했고, 9월 20일에는 폰디에서 프랑스 출신의 로베르트 추기경을 대립교황 클레멘스7세 교황으로 선출해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로마와 아비뇽에 두 개의 교황청에 두 사람의 교황이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황권 행사를 고집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황청은 분열된 채 40여년을 보내게 되는데, 이 기간을 역사는 ‘교황청의 대분열기’(1378-1417) 혹은 ‘서방교회 대분열’이라고 부릅니다. 프랑스는 아비뇽 교황청을, 영국 독일 등은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는 가운데 두 교황은 서로를 ‘적그리스도’로 칭하며 상호 출교를 선언하는 등 심각하게 대립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때는 백년전쟁 기간이어서 전 유럽이 프랑스 교황세력과 로마 교황세력으로 갈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켰고, 중세 교회의 몰락을 예견케 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베드로의 후계자를 인정하는데 그들의 구원이 달려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거의 40여 년간 서로를 파문하고 자기만이 베드로의 의자의 진정한 소유자라고 주장하는 두 교황이 있었으니 가톨릭 세계가 난처하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 분열을 통해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인식되어 오던 하나의 교회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민족교회라는 새로운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