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 폰테스 (Ad Fon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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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 폰테스 (Ad Fontes)
  • 여상기 목사
  • 승인 2017.11.01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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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기 목사·예수로교회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주간이다. ‘아드 폰테스(Ad Fontes)’는 라틴어로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back towards an origin). 기독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중세 종교개혁의 구호였다(back to the bible, back to the basic). 우리가 주창하는 개혁주의생명신학의 근본정신의 요체(要諦)가 된다.
한국교회가 분잡한 종교적인 행사와 구호보다는 근원적인 복음의 본질과 능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행적과 목회의 행실들을 성찰하는 아드 폰테스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하나님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영존하신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성화된 현재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면 세상이 교회를 변질시킨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칸트는 삶과 사고의 기본적 기준과 가치가 모두 바뀌는 것을 혁명이라 일컬었다. 종교개혁은 자기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먼저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내 눈에서 먼저 비늘 같은 것들을 벗겨내야 영적인 세계가 열린다(행9:18).
우상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현존하는 실체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먼저’ 사랑하는 모든 목적과 대상이 다 우상이 된다. 하나님보다 ‘더’ 높아진 자리에서, 믿음이란 명목으로 자행(恣行)한 무수한 편법과 일탈들을 숨김없이 자복하고 하나님의 눈물을 회복해야 한다.

욕심과 야망으로 포장된 인위적인 비전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경계삼아 세속적인 성공과 가치관을 내려놓아야한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사람이다. 건물을 내려놓으면 성도가 보인다. 목회는 목사가 죽어야 되어지는 하나님의 일이다. 교회는 성도가 죽어야 세워지는 예수님의 몸이다.

성도는 움직이는 성전이다. 혼탁해지는 교계를 정화하고, 사회저변의 우울한 참상들을 치유하는 자정(自淨)의 눈물이 있어야겠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일로 마름질하는 보편성과 합리성이 교회에 팽배해지면 마귀는 여지없이 강단을 헤집고 성도의 믿음을 난도질한다(마16:23). 거룩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시11:3).
아드 폰테스(Ad Fontes)는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가 품어야 할 이 가을의 호심경(護心鏡)이다. 릴케는 가을 들판에 바람을 놓아, 남국의 햇볕을 재촉하여, 마지막 남은 단맛이 포도송이에 스미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가을날/Rainer Maria Rilke). 아름 움켜진 내 추수 단에서 이삭을 흘리는 마음으로 줍는 이의 마음을 살피고 보듬자(룻2:15~16). 마지막 열매에 단맛을 더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늦가을 바람결에도 옷깃을 여미며, 그토록 미워하든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뒷모습이 따르는 이에게 아름답도록 아드 폰테스의 교향곡을 가슴에 담자. 시국이 심상치 않다. 총체적 난국이다. 북핵의 위협 앞에, 주변강국들의 각축전 속에서, 우리의 독자적인 외교적 군사적 협상력을 확보하기에는 우리의 무기력이 임계점에 이르렀다.

역사적 전기마다 세상의 마지막 희망은 언제나 교회였다. 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한 걸출한 인물들을 배출해야 한다. 가만히 앉아서 형세만 살피면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다(전11:4). 바다 위를 걸으려면 배에서 내려야 한다. 요단강이 흘러 넘쳐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발을 강물 위에 내디뎌야 뭍이 드러난다(수3:15). 우듬지에 기도의 둥지를 틀어야 하늘이 열리는 법이다(눅19:4)(왕상18:42). 변죽만 울리는 자가당착의 늪에서 이제 아드 폰테스의 강으로 기도의 닻을 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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