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부처(Martin Bucer, 1491~1551) 16세기 종교개혁자(1491-1551년).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신학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 앞장선 인물로 종교개혁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져다준다. 부처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부처는 스트라스부르 시의회와 시민들, 그리고 교회 개혁을 추진하는 성직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이견들을 발견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대와 개혁에 대한 요구들을 갈등하는 경쟁관계로 규정하거나 오직 한 가지 의견만이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처는 성직자들과 더불어 시의회를 교회 개혁의 동반자로 삼아 끝까지 협력을 구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단순히 ‘위로부터의 개혁’을 강압적으로 추진하기보다 끊임없는 ‘설득의 과정’을 통해 교회 개혁을 위한 교구만의 동의를 구했다.
‘잊혀진 개혁가’ 마틴 부처
마틴 부처는 가난한 가정, 즉 통제조업자의 아들로 1491년 11월 11일 프랑스 알사스의 슐레트슈타트(Schlettstadt)에서 출생했다. 15세 때인 1506년 도미니크 수도회를 거쳐 150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 들어갔다. 1508년에 도미니칸 수도사가 된 그는 스콜라신학을 깊이 연구하게 됐으며, 독일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Erasmus)와 종교개혁자 루터의 사상에 정통하게 됐다.
1518년 10월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목격한 그는 개혁신앙을 소유하게 됐으며, 이로 인해 로마제국에 의해 소환을 당한다. 앞으로 당할 큰 고통을 피하기 위해 1521년 도미니크 수도회를 탈퇴했으며, 같은 해에 수녀원을 떠난 여성과 혼인했다. 후텐과 직킹겐의 협력자가 된 그는 1522년 직킹겐의 초청을 받고, 팔라틴에 속한 란드슈툴의 목사가 되어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를 여기저기 알렸다.
그러나 직킹겐이 전쟁에서 트레베스의 선제후에게 패하는 바람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프란체스코 수도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1523년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게 된다. 이후 부처는 체일의 추천을 받은 시의회의 초청으로 스트라스부르로 가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지적 재능과 열정을 인정받아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로서 가장 권위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게 된다.
‘평화’와 ‘협력’의 지도자
특히 마틴 부처는 개혁파의 일치와 연합을 위해 노력했던 평화의 개혁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24년 성찬 문제로 루터와 쯔빙글리가 논쟁을 벌일 때 중재를 시도하였으며,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성만찬에 대한 양 진영 사이의 합의가 실패한 후에도 연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부처의 견해는 루터보다는 쯔빙글리의 입장에 더욱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는 루터파의 성만찬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개혁파와의 공통분모를 부각시켰다. 1531년 쯔빙글리가 죽자 부처는 스위스와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 지도자로 부상했다. 성만찬 외에도 그는 중세의 고해성사 제도를 폐지하고, 개혁교회의 새로운 권징체제를 스트라스부르에 도입하고자 시도했다.
1520년대 초 부처는 중세 천주교회의 고해성사와 참회제도를 강하게 반대하면서 양심의 자유를 옹호했다. 특히 성령은 신자 개개인의 양심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고안해 낸 규율과 외면적인 의식들로부터 해방하였음을 주장했다. 부처의 영향은 벨기에, 이태리, 그리고 프랑스까지 퍼져나갔다. 교회 연합을 위해 노력한 부처는 설교와 성찬을 결합시킨 예배를 실시했으며,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갱신을 위해 힘썼다.
부처는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파 교회를 연합시키려고 노력하며 분리되어 있던 쯔빙글리파와 루터파 사이에서 중재를 하려고 시도했다. 마침내 1536년 5월 29일 이뤄진 비텐베르크 협약(Wittenberg Concord of 1536)에서 부처는 성만찬에 대해서도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부처는 1539년 제네바 개혁에 실패하고 추방당한 칼뱅을 스트라스부르로 초청해 정착을 도와주었다. 부처는 치리를 통한 개혁을 강조했는데 이는 칼뱅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목회에 관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그가 개혁교회의 원조로서 특히 칼뱅에게 끼친 영향은 절대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뱅의 영적인 아버지’로 알려진 부처에 대한 연구는 국내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특히 칼뱅이 이곳에서 저술한 ‘기독교강요(1539)’와 ‘로마서 주석(1540)’에서도 루터는 물론 부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신칭의’-‘예배신학’ 강조
그는 루터와 마찬가지로 이신칭의 교리를 설교했는데, 부처에게 있어서 칭의는 의(義)의 전가와 분여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선행(先行)하시고, 모든 불경건을 용서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경건한 사람을 칭의하지만, 불경건은 용서되고, 사면(赦免)된다.
또한 그때 성령이 주어지는 바, 성령은 모든 불경건은 피하게 하시고, 경건에 대한 열심을 품게 하신다. 그 결과 이런 방법으로 성령은 우리에게 다음에 따라오는 유익들(은혜들)을 주신다. 마치 그것이 경건에 대한 상급과 보상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성령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 경건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지도 않고 사면하시지도 않은 자의 불경건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역시 그의 불경건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들에 따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사람의 불경건에 대해 처벌하신다.
부처의 예배신학은 개혁교회 예전의 기원이 되는 스트라스부르 예배문과 제네바 예배문의 기원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예배형식 전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중세 예배의 두 형태인 프론(Prone)과 미사(Missa)를 종합해 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초대교부들의 가르침에 충실하도록 개작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나타낸다. 즉 중세의 예배를 대표하는 미사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와 그것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자의 덕을 쌓는 공로가 된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었던 반면, 부처의 예배 개념은 제사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단회성을 강조함으로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개념을 거부한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가르쳤다. 또한 기독교 예배를 찬미와 감사의 제사로 정의함으로써 예배행위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공로개념을 거부했다.
스트라스부르 추방 후 마틴 부처
1529년 ‘3.2.16.3 슈말칼드 전쟁’에서 승리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5세는 1548년 ‘아우크스부르크 잠정협정’을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강제로 서명토록 했다. 이를 강력히 거부한 부처는 25년간 섬겼던 스트라스부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T. Cranmer)의 초청을 받아 1549년 아우구스부르크를 떠나 영국에 머물면서 영국 종교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 케임브리지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부탁으로 ‘그리스도의 치리(De Regno Christi)’를 저술했다.
책을 통해 부처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성격을 가르치고, 그것은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에 머무는 동안 부처는 크랜머가 ‘공동 기도서’를 발간하는 일에 협력했고 성공회 신학 형성에도 영향을 끼쳤다.
에드워드 왕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던 그는 1551년 병을 얻어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시신은 케임브리지대학교 교회 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1556년 영국 왕 에드워드 6세를 이은 ‘피의 여왕 메리’는 그의 시신을 발굴하여 공개적으로 화형에 처했으며, 4년 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를 다시 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