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종교개혁의 체계를 만들어낸 ‘화해의 신학자’
상태바
루터 종교개혁의 체계를 만들어낸 ‘화해의 신학자’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10.19 10: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⑥ 필립 멜란히톤
▲ 필립 멜란히톤의 초상화, 루카스 크라나흐, 1537년.

필립 멜란히톤
(Philip Melanchthon, 1497~1560)
루터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필립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인물 중에서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루터 역시 멜란히톤이 가진 사고와 신학적 업적, 인품에 대해 격찬을 아까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신학계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는 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개혁가이다. 

필립 멜란히톤은 1497년 2월 16일 독일 브레텐에서 출생했다. 일찍부터 촉망받는 재원이었던 그는 14세에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졸업하고 1518년 젊은 나이에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임용됐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적극 대변하면서도 종교개혁가들 간, 심지어 개신교와 로마가톨릭 간 대화를 위해 노력했던 화해자였다. 특히 신앙과 인문주의 접점을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당대뿐 아니라 1560년 사후 멜란히톤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다행히 시간이 흘러 1800년대 이후 그의 업적은 중요하게 부각됐다.

루터 종교개혁 정신의 대변자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 온 멜란히톤을 처음 만났을 때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평가절하 했음을 고백했다. 160cm가 채 되지 않은 키의 멜란히톤을 본 대학 관계자와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취임연설에서 멜란히톤은 학문적 열망과 능력으로 편견을 금방 일소시켰다. 루터는 그가 가진 학문역량에 흠뻑 빠져들었다. 

멜란히톤을 흔히 루터의 대변자로 칭하는 것은 루터신학의 체계를 완성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멜란히톤이 루터를 옹호한 인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베텐베르크대학 초기부터 루터의 사상을 배우고 계승했기 때문이다. 

1519년 루터가 가톨릭 신학자와 논쟁하며 “공의회도 잘못했을 수 있다’”고 주장할 때 멜란히톤은 역사적 근거를 제시했다. 멜란히톤은 루터를 적극 지지하고 변론하면서 학문적 성과를 높이고 긍정적 평가들이 더 공고하도록 만들었다. 

1520년 교황이 루터와 추종자들을 파문하고 추방했을 때 멜란히톤은 그의 부재를 메우는 역할을 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때 훌륭한 조력자가 된 인물도 멜란히톤이었다. 

특히 멜란히톤이 1521년 처음 출판한 ‘신학총론’(Loci Communes)은 루터의 사상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해 뼈대를 만들고 구체화했다. 신학총론은 자유의지, 죄와 율법, 복음, 은혜 등을 주제로 다룬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서로 평가되는 책이기도 하다. 

루터와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한길을 걸으며 공존했지만, 더 세부적으로 보면 약간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멜란히톤의 저서를 자신의 것보다 더 우수하다고 호평했다. 

루터는 “내 저술은 오합지졸과 싸우면서 대체적으로 호전적이지만 멜란히톤은 부드럽고 친절하게 다가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섬기는 은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전했다.  

▲ 멜란히톤의 신학총론. 1521년판.

중재와 대화의 사명자 
멜란히톤은 강경했던 루터에 비해 온화한 편이었다. 특히 누구와도 대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총신대 정원래 교수는 “멜란히톤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직후 종교개혁 진영뿐 아니라 상대적인 로마가톨릭과도 대화를 통해 오류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으며, 비주류 진영의 목소리도 귀기울였다”며 “멜란히톤은 루터교뿐 아니라 개신교 신앙고백을 대표했지만 누구와도 기꺼이 대화했다”고 평가했다. 

루터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 존 칼빈이 ‘성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중재해 달라며 서신으로 요청한 인물이 멜란히톤이었다. 멜란히톤은 대화와 회담이 있는 자리에서 중재자로 영향력은 매우 컸다. 하지만 그의 기본 논리는 개혁주의 신앙에 입각한 변증이 핵심이었다. 

멜란히톤은 1530년 루터교 최초의 신앙고백 문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저술한다. 교황과 로마가톨릭 귀족들은 종교개혁에 반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처벌받을 수 있도록 한 보름스 칙령이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터교가 이에 반발하던 예민한 시기 멜란히톤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완성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은 루터가 인정하고 받아들였으며, 가톨릭 진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수용되진 않았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작성하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그는 체계적이면서 상호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별하면서 종교개혁의 진수를 드러냈다. 

백석대 주도홍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 신앙고백은 멜란히톤 사상의 성숙뿐 아니라 변천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후 하게나우 종교회담, 보름스 종교회의, 레겐스부르크 종교회담 등에서도 멜란히톤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멜란히톤은 당대 매우 강력하게 적대적으로 인식됐던 유대인과 이슬람인과의 관계에서도 유연한 태도를 나타냈다. 

이 때문에 로마가톨릭은 멜란히톤을 회유하기 위한 제안들을 내놓기도 했지만 그의 종교개혁 신념은 굳건했다. 

인문주의자 멜란히톤
멜란히톤은 종교개혁 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를 적극 옹호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멜란히톤이 신학에 더 적극 매진하지 않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문학을 바라보는 멜란히톤의 생각은 달랐다. 

계몽주의 이후 인문주의는 종교와 대립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종교개혁 당시 인문주의를 멜란히톤은 신학을 이해하는 데 적극 활용해야 할 가치로 인식했다. 

사실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 권위에 대한 저항, 성경 원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가치를 불러일으켰다. 그 영향이 문예부흥, 르네상스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배타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멜란히톤은 둘 사이 관계를 우호적으로 인식하고 조화를 이루도록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멜란히톤은 자신의 집에 늘 사람들을 초청하기를 즐겨했고, 특히 젊은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과정에서 수사학, 헬라어,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에 대한 대화를 즐겨했고, 학생들은 인문학 지식을 이용해 설명하는 젊은 교수를 깊이 추종했다. 

‘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을 비방했던 대표적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젊은 멜란히톤을 매우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 교육에 전념하길 바랐고, 중요한 동역자였던 작센지방 프리드리히 제후에게 신학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멜란히톤은 노년 때까지 인문주의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인문주의에 대한 멜란히톤의 생각은 비텐베르크대학 취임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타락하지 않은 교회는 위축되어 있는 교육을 도울 수 있다. 건전한 교육도 타락한 교회를 개량할 수 있고, 피곤에 지친 정신을 일깨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정원래 교수는 “멜란히톤은 탁월한 그리스도인 학자였으며, 성경신학과 경건을 휴머니즘 문화와 조화시킬 줄 아는 보기 드문 재능의 소유자였다”고 극찬했다. 

멜란히톤은 루터가 사망한 1546년에도 루터를 계승하고 있으며, 루터만큼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멜란히톤에 대한 업적이 초창기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평가도 있었다. 

멜란히톤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순수한 그의 신앙을 보여준다. 

“나는 죄와 신학자들의 분노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만나 우리가 왜 창조되었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어떻게 연합하는지에 대한 신비도 알게 될 것이다”.

또 멜란히톤의 사위가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을 묻자, 그는 “하늘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묻지 말아 달라”고 답했다. 1560년 63세를 일기로 임종한 멜란히톤은 비텐베르크교회 안치된 루터의 무덤 옆에 안장됐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