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개혁 5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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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종교개혁 5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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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10.1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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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성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학

개신교 탄생의 정당성 확인을 반복하는 것이 올해의 유일한 과제는 아닐 것이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제들 중에 미비한 부분을 완성하거나 보충하는 것 또한 그 과제의 전부가 될 수 없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함께 축하할 의향이 있을까.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이 더 많을까. 더 나아가 심지어는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애도할 마음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인가. 우리 세대의 튀빙엔 가톨릭신학자 힐베라트는 대다수의 가톨릭 신자들은 종교개혁을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중요한 사건으로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종교개혁 당시에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거절당했던 루터의 개혁요구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 대부분 수용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로마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분열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종교개혁의 결과물인 개신교회도 개혁을 완수한 바 없이 여전히 개혁되어야 하고, 가톨릭교회도 교회의 계속적인 정화와 갱신을 필요로 한다고 시인한 만큼, 개혁은 필요하지만 분열이 결과물로 남은 종교개혁과 같은 사건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교회는 결코 개혁을 완수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다만 교회에는 계속 개혁 되어야할 과제가 있을 뿐이다. 분열이 없이 말이다. 교회의 갱신은 복음이해의 갱신, 즉 일치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선교적 기도는 이것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는 분열의 정당성 옹호에서가 아니라 일치로의 방향성 안내에서 찾아야 한다. 개신교의 사회학적 성서신학자 타이센은 “개혁은 예수의 선교적 기도내용인 일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의 탄생 모두 내 생각으로는 좌절된 개혁의 결과물인데, 이 입장은 그것이 그 본래의 목표를 달성했는지를 생각하면 이해가 될 문제”라며 “그 둘은 본래 새로운 종교나 새 교회를 세우려는 시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본래의 목적은 유대교와 가톨릭교회의 갱신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기독교와 개신교를 만들어 냈다”고 결과를 강조했다.

그는 분열이 초래되지 않을 갱신을 기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이 없는 갱신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 ‘좌절된’ 개혁의 의미로 △교회비판이 당시에 교회갱신의 표어였던 것처럼 오늘날도 종교개혁에 대한 비평적 태도가 꼭 필요하다는 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지만 그 좌절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번쩍였다는 점 △좌절된 종교적 운동들은 후손들이 계속 진행해야할 과제를 남겨놓았다는 점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타이센은 선교의 과제를 교회의 일치와 사회적 역할에서 찾았다. 일치를 위한 사회적·선교적 대화로서 △첫째 간 종교적 기독교 대화성경을 기획할 것 △둘째 에큐메니컬적이고 간 종교적인 개방된 교회 직제구조들을 기획할 것 △셋째 인권적 신앙고백의 기획을 제안하고 그 샘플을 제시할 것을 제안했다.

개신교회의 선교는 20세기 기독교의 에큐메니컬 각성을 통해 개신교회적인 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하게 됐다. 하나님의 선교로 대변되는 현대와 후현대기의 선교의식은 개신교의 울타리를 넘어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긍정을 두 축으로 삼고, ‘이미와 아직’사이에 진행 중인 종말론의 바탕 위에 전개되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다시 더 잘 개혁되어야 한다. 선교는 그 이해 지평이 확장되었다. ‘알지만 못한 것’과 ‘몰라서 못한 것’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 개혁된 선교는 종교개혁의 이상이었던 부분을 현재의 신학으로 확인해 보고, 그것이 본질적인 것임을 확인했을 때 교회간과 더 나아가서는 세상 안에서의 일치를 목적론적으로도, 그리고 방법론적으로도 표방하여 구체적인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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