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종교개혁사 ⑤라이프치히 토론, 15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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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 종교개혁사 ⑤라이프치히 토론, 1519년
  • 주도홍 교수
  • 승인 2017.10.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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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백석대학교 부총장 / 역사신학

루터와 인골슈타트대학교의 부총장 에크 출신 요한 마이어(보통 Eck로 일컬음) 사이 논쟁은 서로의 친필을 통해서 시작됐다. 1518년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칼슈타트에서 온 안드레아스 보덴슈타인(보통 Karlstadt로 일컬음)이 먼저 에크의 글을 반박하였다. 이에 에크가 공개토론을 제안했고, 루터가 1518년 10월 에크에게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만나자고 하자, 에크는 반종교개혁의 정서가 강한 라이프치히대학교를 생각하며 라이프치히 또는 에어푸르트를 제안했다.

제후 게오르그의 제안으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5일까지 라이프치히에서 두 측이 공개토론을 열기로 하였다. 

엄격하게 말하면, 아직은 양측의 입장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비텐베르크에서 온 사람들이 라이프치히에 도착하였는데, 첫 마차에는 칼슈타트가 탔고, 다른 마차에는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이 그리고 비텐베르크대학교의 총장인 포메른 주의 공작 바르님이 함께 했다. 게다가 무장한 비텐베르크대학교의 학생 200명이 함께 왔다. 토론자로는 종교개혁 측에서는 루터와 칼슈타트가, 로마교회 측에서는 에크가 나왔다. 

먼저 6월 27일부터 7월 3일까지 칼슈타트와 에크가, 7월 4일부터 14일까지 루터와 에크가, 연이어 7월 14일부터 15일까지 칼슈타트와 에크가 토론을 하였다. 토론 장소로 대학 또는 교회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반종교개혁에 선 작센의 게오르그 공작의 결정으로 라이프치히대학교 근처에 있는 플라이센부르크 성 별실에서 하기로 하였다.

두 명의 토론 진행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고, 네 명의 공증인이 토론 내용을 참나무 판에 써내려갔다. 토론은 라이프치히대학교의 교수 페트루스 샤데 모젤라누스의 한 시간이나 걸리는 라틴어 개회사로 시작되었는데, 양편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기를 추구했다. 칼슈타트와 에크의 토론 주제는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였는데, 게다가 선행과의 관계였다.

7월 4일부터 시작된 루터와 에크의 약 10일간의 논쟁은 먼저 에크가 교황의 수위권과 공회의 권위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강력하게 변호하였다. 에크는 루터를 화형에 처한 전 종교개혁자 얀 후스 곁으로 몰아갔고, 번번이 발언 시간을 초과하였다. 이때 루터는 콘스탄츠 공회가 정죄한 후스의 모든 사상이 이단시 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후스의 사상이야말로 아주 그리스도적이며 복음적이라고 말하였다. 루터의 이 발언에 게오르그 공작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루터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Sola Scriptura) 볼 때, 교황의 수위권은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멜란히톤이 루터의 뒤에 앉아 메모를 전하거나 속삭일 때, 에크는 멜란히톤을 화난 얼굴로 째려보았다. 물론 에크 곁에도 라이프치대학교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종종 졸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7월 15일 요한 랑기우스 렘베르기우스의 연설로 토론은 막을 내렸다. 서로가 자신들이 이긴 토론이라고 자평하였다. 후에 에어푸르트와 파리에서 라이프치히 토론의 원문이 멜란히톤의 해설과 함께 출간되었는데, 이로써 루터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양측의 신학이 얼마나 다른 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신앙문제에 있어 교황과 공회가 최고의 권위를 갖지 않으며, 오직 성경만이 최종 판단의 근거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사상은 결국 로마교황청과의 단절로 이어져 종교개혁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1519년 라이프치히 토론은 종교개혁자 루터 사상 형성과 퍼짐에 있어 결정적이었고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대적자 에크는 로마 교황청이 루터를 파문하는 일에 매달렸는데, 루터를 파문했던 1521년 보름스의회에서도 황제의 대변인으로 에크가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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