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개 조항’ 내걸고 스위스 종교개혁

인물로 보는 종교개혁 500년 (5)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공종은 기자l승인2017.10.11l수정2017.10.13 02:48l140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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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리스도만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사람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지시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혼의 살인자이며 도둑”

울리히 쯔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1484년 1월 1일 스위스의 빌드하우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중산층이었지만 명문가 태생으로, 마을의 행정관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을 힘입어 비엔나와 베른, 바젤대학을 거치면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쯔빙글리는 대학과정을 마치고 인문주의 학교와 대학교들에서 지냈으나, 친밀한 스콜라주의 계통을 따랐는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루터가 독일에서 개혁을 진행하는 동안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었는데, 스위스의 도시 국가들이 안고 있었던 가장 불합리한 관습부터 개혁하기 시작했다.

# ‘성경’이 최고의 권위

▲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연구한 확신에 따라 변질된 예배를 개혁해 말씀 중심의 예전을 추구하는 데 집중했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핵심인물로 불리는 쯔빙글리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여겼고 마틴 루터보다 더 엄격하고 포괄적으로 모든 교리와 의식에 성경을 적용시켰다. 1504년 바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506년 사제가 됐고 글라루스교회에 부임해 10년 동안 사역했으며, 탁월한 설교로 인해 많은 청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1518년 취리히의 심장으로 불리는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 대교회에서 민중사제로 임명됐다.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활동의 중심지가 됐으며, 그해 처음으로 강단의 계획을 발표했다.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사도행전을 강해했는데, 마태복음은 산상수훈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인문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책이었고, 사도행전은 원시 교회 안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도식을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기독교대백과사전은 설명한다. 또한 갈라디아서와 디모데전후서를 통해 바울의 가르침을 전했고,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이 어떻게 일치했는가를 보기 위해 베드로전후서를 강해했다.

이후 쯔빙글리는 1520년 경 시당국으로부터 진실하고 거룩한 성서를 설교해도 좋다는 허락을 얻는데, 설교를 통해 금식과 성직자의 독신에 대해 반대하도록 했고, 1525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설교했다. 그리고 이것이 스위스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게 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성경을 연구한 확신에 따라 변질된 예배를 개혁해 말씀 중심의 예전을 추구하는 데 집중했다. 로마 가톨릭의 이교적인 예배의식을 공격하면서 성만찬의 횟수를 파격적으로 줄였다. 또한 우상숭배의 대상이 됐던 교회의 조각들과 장식들을 제거하는 등 가톨릭의 흔적들을 교회에서 철저하게 배제해나갔다. 면죄부 제도를 전면 부정했고, 극도에 달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퇴폐를 공박했다. 세 자녀를 둔 젊은 과부와의 결혼도 쯔빙글리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당시 가톨릭은 성직자의 혼인을 금지했는데, 쯔윙글리는 세 자녀를 둔 과부와 결혼하면서 정면 도전했다.

이런 쯔윙글리의 주장은 독일의 루터와 닮은 듯 하면서도 현저히 다른 면들도 보인다. ‘성찬’이 대표적인 것. 루터와 쯔빙글리는 성찬식을 희생제사로 간주하지 않는 것과 실체의 변화라는 화체설을 거부하는 것에서도 일치된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구절과 관련 루터의 주장과는 입장을 달리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현림한다고 가르친 반면, 쯔빙글리는 실제로 현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성한 임재, 즉 성령의 힘에 의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한 기념이라고 가르쳤다. 쯔빙글리는 이런 주장을 1526년에 발간된 ‘성찬에 대하여(On the Lord’s Supper)’를 통해 피력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는 이 문제로 인해 루터와 갈라서게 됐다고 주장한다. 김 목사는 “루터는 성찬을 거행할 때 성찬과 함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했는데, 쯔빙글리는 이를 거부하고 성찬은 순전히 영적 및 상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면서, “두 사람의 교제는 1529년 파국에 이르렀고, 교회의 연합은 깨어지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이런 차이점에 대해 강경림 교수(안양대)는 “쯔빙글리는 교황제도의 체계를 쉽게, 급속도로 허물어 버렸지만, 루터는 단계적으로, 깊은 생각 끝에 무너뜨렸다.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과격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법과 질서의 한계 내에서 했으며, 그리고 광란적으로 하지 않았다. 루터는 독일을 위해, 쯔빙글리는 스위스를 위해 예정된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67개 조항(Die 67 Artikel)’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단어. 쯔빙글리의 67개 조항은, 취리히의 시의회가 1523년 1월 29일 개최하기로 한 콘스탄츠 총주교 휴고 감독의 대리 파브리(Jahannes Fabri)와의 ‘제1차 취리히 논쟁’을 준비하면서 정리한 것. 쯔빙글리는 자신의 가르침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역설하고, “만약 내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면 나는 수정될 준비가 되어 있지만, 그것 역시 오직 동일한 성경으로부터 뿐이다”라면서 성경에 근거해서만 비판을 받을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로마 교황과 저들이 따르는 바에 대한 주의 △미사 △성인들의 중재 △선행 △성직자들의 부 △음식을 금함 △축제와 순례 △두건 달린 수도복과 배지 △성직계급과 당파 △성직자의 결혼 △거룩하지 않은 설교자는 부인을 얻는가 △순결에 대한 맹세 △출회 △소유주 불명의 물품 △권위자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세속 권위자 △기도 △실족 △죄의 용서 △죄를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보류된 용서 △연옥 △성직과 서품 △악한 행실을 다루는 것 등에 대해 반박하고 성경이 말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쯔빙글리는 “복음이 교회의 비준 없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 있게 될 사람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하나님께로 향하는 다른 길을 추구하거나 지시하는 자는 누구든지 영혼의 살인자이며 도둑”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이 논쟁에서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영이 유일한 재판관”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토론회 이후 시의회는 선고문을 통해 쯔빙글리가 계속해서 거룩한 복음과 참된 성경말씀을 오랫동안 선포할 수 있게 했다. 강경림 교수는 이에 대해 “취리히의 다른 모든 설교자들과 목회자들은 거룩한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설교할 수 없도록 했으며, 개인적인 논쟁이나 인신공격 등을 삼가도록 했다. 이것으로 인해 취리히에 종교개혁의 승리가 결정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67개 조항은 6년 전 루터가 면죄부 판매에 대항하여 공포한 95개 논제와 공통점을 갖고 있으나, 67개 조항이 프로테스탄트의 정서에 있어서는 큰 진전을 가져온 것이고, 더 많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이 조항들은 유일한 구세주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로 꽉 차 있고,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최고성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으며, 교황, 미사, 독신행활, 연옥 등 비성경적인 인간의 계율들을 거부하며 공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설교로 개혁 성취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예배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주승중 목사(주안교회)는 “그가 시행한 개혁의 형태는 비록 예배 역사의 단절을 가져온 결과라는 심각한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결과는 개혁교회의 예배를 주도하는 영향을 남겼다”면서, “1523년의 ‘미사경본 비판’과 1525년의 ‘주의 만찬의 활용법’은 쯔빙글리 계열의 개혁교회 예배의 표준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는 형식이 주의 만찬의 활용법에서 유래되고 있다”고 말한다.

설교는 쯔빙글리의 사역의 중심이었다. 다아간은 그의 책 ‘설교의 역사’에서 “설교가로서 쯔빙글리는 역사상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그의 사역은 설교가 중심이었고, 주로 설교에 의해 사람들을 얻고 지켰으며 개혁을 성취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중세의 형식적인 미사를 통해 잃어버렸던 말씀을 선포를 본래의 자리로 환원시켜 새로운 생명의 양식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일깨우는 설교자로 묘사하는데, “지상의 교회들이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리게 되는 길을 갈고 닦았던 신념에 찬 그 업적은 현저하다”고 강조한다.

공종은 기자  jekong@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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