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파괴운동 오히려 예술적 창의력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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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파괴운동 오히려 예술적 창의력 불러왔다”
  • 김성해 기자
  • 승인 2017.08.31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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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미션 주최 ‘2017 크리스천 아트포럼-예술의 창조적 영성’
▲ 나사로의 부활, Rembrandt, 1630~1632년, 96.36 x 81.28 cm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파괴는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 예술의 발달을 보면 이 문장이 매우 적절함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가톨릭교회 성전 내부에는 벽화들과 제단 등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16세기 칼빈파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대부분의 벽화들과 제단들이 다 제거됐고, 성전 내부에는 어떠한 장식적인 요소도 발견할 수 없게 됐다. 

이를 두고 ‘성상파괴운동’이라고 부르는데, 얼핏 보면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더 이상의 예술은 발전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술은 이를 계기로 더욱 다양한 발전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에 대해 라영환 교수(총신대학교 신학과)는 “화가들에게 변화된 시대적 상황은 그 시대적 상황에 맞는 소명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며 “그들은 풍경화와 풍속화라는 장르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이어나갔고, 그 재능 속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했다. 그들에게 소명은 자신의 재능을 통해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5일 아트미션 주최로 서울 백주년기념교회에서 진행된 ‘2017 크리스천 아트포럼-예술의 창조적 영성’ 포럼에서 발제한 라영환 교수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예술을 종교개혁의 적용과 열매로 평가했다.

그는 “17세기 네덜란드는 강력한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있었다. 또 칼빈의 사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며 “17세기 네덜란드 개신교들은 칼빈의 신학을 적극 수용했고, 자신들의 삶 속에 적용하며 이를 확장시켜나갔다. 17세기 네덜란드 예술의 발전도 이러한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 교수는 당시 칼빈이 중세교회의 잘못된 관행으로 물든 교회를 바로 잡으려했으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칼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이 있다고 했으며, 이 심연은 교회 내 성상들, 성인들의 유골 혹은 유품들로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 중세 교회들의 의견에 반박했다. 이와 같은 칼빈의 판단으로 인해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라 교수는 “얼핏 보면 칼빈이 당시 예술이 기독교 신앙과 대치되는 것으로 구분했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며 “칼빈은 예술의 재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라고 봤으며, 조각, 회화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그 재능을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한다면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칼빈은 하나님의 현존이나 영적인 체험을 느끼기 위한 그림, 조각물들이 교회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결정했다”며 “하지만 그 작품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성경의 이야기를 전하는 묘사의 역할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순수하고 정당하게 자연 그 자체를 묘사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여겼다”고 밝혔다. 

칼빈이 제시한 순수하고 정당한 예술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꽃을 피웠다. 당시 네덜란드는 칼빈주의를 지배적 가치체계로 받아들였으며,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고, 노동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과정이었으며, 게으른 행동과 태만은 죄로 여겼다. 

네덜란드 화가들도 시대적인 변화 흐름에 따라 그림들을 그리고 그 작품들을 들고 직접 거리로 들고 나왔다. 변화된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뽐내야했던 네덜란드 화가들은 풍경화, 풍속화 등의 새로운 방식의 그림들을 그려냈다. 

라 교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린 풍경화, 풍속화, 성경 그림은 소재와 표현 방식에 있어서 가톨릭 진영의 그림과 구별됐다”며 “네덜란드의 사회적 특수성은 예술가들이 더 이상 중세의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했다”고 말했다. 

라영환 교수는 이 시대 네덜란드 시장 요구의 기저에는 종교개혁이라는 신학적 요인이 깔려있었고, 그 속에서 창출된 그림들은 대중들에게 종교개혁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고 확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밝혔다. 라 교수는 “결국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와 풍속화, 성경 그림은 종교개혁의 열매였고 적용이자 그들의 고백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종교개혁하면 우리들은 신학자들을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종교개혁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일반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역시 그들 중 한 무리였다”며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 종교개혁은 종교가 아닌 삶의 개혁, 세계관의 개혁임을 기억하고 종교개혁의 기치는 신학자들이 낳았던 종교개혁이라는 알을 적극적으로 품었던 일반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산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길 바란다”며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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