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모델, 옥스퍼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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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모델, 옥스퍼드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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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6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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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중세의 대학들(4)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옥스퍼드대학 졸업식 축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칠은 천천히 강단으로 올라와서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청중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You, Never give up!”(결코 포기 하지 마라!) 그리고 잠시 후에 좀 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You, Never give up!” 그리고 다시 잠시 후에 이번에는 아주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You, Never give up!” 그리고 강단에서 내려왔습니다.
 
옥스퍼드대학(University of Oxford)은 1133년 파리 대학에서 ‘뷜랑’이라는 신학자를 초청해 강의한 것이 계기가 되어 세워졌습니다. 그후 파리와 볼로냐로부터 학자들이 12세기 초반에 교통이 편리한 런던 근처의 상공 도시 옥스퍼드에 흘러 들어와 강의하곤 했습니다. 마침 영국의 헨리 2세(1154~1189)와 프랑스의 루이 7세(1137~1180) 사이의 줄기찬 반목이 파리에 있는 영국학자들의 처지를 어렵게 했는데, 헨리 2세는 1167년에 그들에게 귀국을 명령했고 영국 학생들을 파리 대학으로 유학하는 것을 금지하므로,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은 옥스퍼드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옥스퍼드는 파리 대학의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정착하면서 대학 도시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옥스퍼드가 교육의 중심지로서 자리 잡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옥스퍼드는 런던 북서쪽 템스 강 상류에 산재해 있던 학교들을 통합하여 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되자 파리대학에서 공부하던 영국 학생들이 귀국하면서 대학으로서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리대학이 옥스퍼드대학을 출범시킨 원형이었습니다. 

그 후 파리에서 가장 많은 학생들이 옮겨와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대학과는 달리 옥스퍼드대학에서는 학부가 구별되지 않았고 따라서 학장도 없었습니다. 교회와 관계없는 많은 학교의 연립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대학 자치권 문제를 놓고 시 당국과 대학 당국의 격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옥스퍼드대학은 인접한 시읍과의 대립 사이가 발생되어 “town이냐, gown이냐”하는 경쟁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마침내 옥스퍼드는 시 당국과의 관리에서 독립 자치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지금의 옥스퍼드대학은 학문의 자유보다는 대학의 자치를 더 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은 13~14세기에는 중세 스콜라신학의 중심지로 교회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15~16세기에는 유럽의 문화와 예술의 큰 부흥을 가져다 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종교개혁 후 17세기에 일어나는 청교도 운동과 영국에서 경건운동, 나아가 미국의 대 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반면, 19세기 말(1828-1832)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영국성공회 신학자들이 “옥스퍼드 운동(Oxford Movement)”을 일으킴으로 기존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교의 사상과 전통으로 전형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에서 대학들은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모델로 삼아 인격교육을 중요시하는 귀족 중심의 학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후에 런던대학교와 같은 많은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변화가 일어났지만 귀족적인 교육, 신사 교육, 지도자 양성 등을 중요시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 하버드대학(1636년)을 비롯하여 프린스턴대학교(1746년)등 초기 미국 대학들도 대부분 옥스퍼드대학을 모델로 삼아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 후 옥스퍼드대학은 지금껏 수많은 명사를 배출해낸 곳입니다. 영국의 총리를 26명이나 배출하였고, 최소 50명 이상의 세계 정상들과 왕을 배출하였고, 50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자를 낳은 영어권 최초의 대학으로 800년 역사를 자랑합니다.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루엘 톨킨, 오스카 와일드, C.S. 루이스 등과 같은 문학가뿐만 아니라 마거릿 대처나 토니 블레어 같은 영국 수상은 물론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의 모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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