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은 주님의 것, 심장을 도려내듯 나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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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은 주님의 것, 심장을 도려내듯 나를 바칩니다”
  • 제네바=김성해 기자
  • 승인 2017.08.16 10: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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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종교개혁자들의 길을 걷다(중)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출발해 자동차로 1시간 30분 남짓 달리자, 라인 강이 나타났다. 강 건너편은 프랑스라고 했다. 실제 200미터 길이의 다리를 중간 쯤 지났을 때, 휴대폰에 ‘France’라는 글자가 등장했다. 새삼 이처럼 간단하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껴진다. 대한민국에서 갖는 국경의 무게감 때문일까. 

생각을 떨치고 강을 건넌 후 향한 곳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였다. 칼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이다. 칼빈의 고향은 프랑스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추방당했을 당시 그는 3년 동안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저술활동을 펼치고 가정을 꾸렸다. 칼빈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이다. 

153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칼빈은 또다른 종교개혁가 마틴 부처의 초대를 받아 스트라스부르로 이동했다. 칼빈이 이 도시에 살던 3년 동안에 대해 학계에서는 의견이 둘로 나뉜다. 일부에서는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뒤 발길이 닿은 곳이 스트라스부르이기 때문에 3년 동안의 삶이 불행했다며 ‘단절설’을 주장한다.

반대 입장에서는 칼빈은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었다는 ‘연속설’이 제시됐다. 그 당시 칼빈의 삶이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에 대한 학계의 고민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네바에서 축출 당한 칼빈이 3년 동안 머물렀던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주도홍 교수는 "칼빈의 스트라스부르의 삶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고 말했다.

칼빈의 안식처가 된 도시, 스트라스부르
차에서 내리자 시야에 들어온 스트라스부르 거리는 흡사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파스텔 톤의 건물들과 녹음이 우거진 나무들, 그리고 푸른 하늘과 나뭇잎 색을 머금고 흐르는 강. 어우러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백석대 주도홍 교수는 칼빈의 연속설에 견해를 같이하는 듯 했다. 주 교수는 “칼빈의 생애 중 스트라스부르에서 지냈던 시간은 가장 행복한 삶이었으며, 그와 같은 행복은 어디에서도 주어지지 않았다”며 “스트라스부르에서 칼빈은 저술활동을 펼치며 ‘기독교 강요’ 2판을 출판했으며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사역도 펼쳤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자인 마틴 부처와 여러 종교개혁자들을 만나며 교류하는 시간을 보냈으며,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린 곳”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물은 성 토마스 교회였다. 이 교회는 마틴 부처가 1524년부터 1540년까지 목회했던 곳인데, 그의 목회 기간과 칼빈이 스트라스부르에 발을 디딘 시기와 맞닿는다. 마틴 부처는 이 곳을 방문한 칼빈에게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한 목회를 요청했다. 이로 인해 칼빈이 피난민들을 위해 사역한 교회가 바로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방패교회다. 

지금은 다른 교회 건물이 세워져있기 때문에 당시 피난민들을 위해 사역했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당시 그의 목회로 인해 교회에는 400~500여 명의 피난민들이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 또한 이 교회는 스위스 제네바 그리고 프랑스 개혁파 교회들에게 모범이 되기도 했다. 

▲ 칼빈이 3년 동안 지냈던 스트라스부르 거리. 오른쪽 갈색 건물은 그가 프랑스 피난민들을 위해 사역했던 교회 터이다.

마틴 부처의 성 토마스 교회와 근접해 있는 방패교회는 마틴 부처와 칼빈의 관계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당시 칼빈은 마틴 부처로부터 개혁교회적 성례와 예배의식, 교회정치, 장로제도 등과 관련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칼빈은 피난민 사역을 하면서 마틴 부처의 예배의식을 기초삼아 프랑스 피난민교회 예배 의식을 확립했고 이 예배가 후일 개혁교회 예배의 모형이 됐다.

이외에도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 강요’ 2판과 ‘사돌레토에 대한 답변’ 등을 출판했으며, 로마서를 시작으로 그의 일생동안 주석집필을 하게 해준 곳도 바로 이 도시였다. 또한 종교개혁자 마틴 부처와 카피토 등과 교류를 통해 종교개혁가로 성장하게 된 곳도 바로 스트라스부르였다. 

개인적으로 칼빈을 종교개혁가로 성장시킨 스트라스부르는 유독 더 머물고 싶은 도시였다. 아마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돌아가는 심정이 이와 같았을 것이라 추측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개신교의 로마’라 불리는 도시 제네바
스위스의 제네바는 16세기 칼빈으로 인해 개신교의 중심지가 됐으며, 이 곳으로부터 유럽 전역으로 개신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개신교의 로마’라고도 불린다. 무엇보다 제네바는 칼빈의 도시이다. 칼빈의 사택과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역했던 교회, 그가 세운 제네바 대학, 그리고 그의 무덤과 종교개혁자 기념조형물들을 도시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제네바에 도착해서 처음 찾아간 장소는 기욤 파렐의 집이었다. 파렐은 칼빈과 함께 스위스에서 추방당했지만 제네바 시에서 다시 돌아와 줄 것을 요청하자 자신보다 스무살이나 어린 칼빈을 설득시켜 제네바에서 사역하게 한 인물이다. 

당시 칼빈과 파렐을 축출했던 제네바는 칼빈이 종교개혁자로 성장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도시는 무질서와 혼란으로 뒤엉켜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칼빈과 파렐에게 우호적이었던 기욤파의 세력이 크게 성장했다. 이들은 파렐과 칼빈을 다시 제네바로 데려오고자 했다. 

그러나 칼빈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떠날 생각도, 제네바로 다시 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칼빈은 자신을 설득하러 온 파렐에게 “매일 나를 천 번이나 망가뜨리는 그 십자가를 지느니, 백 번 죽는 것을 택하겠다”라고 전할 정도였다. 

하지만 파렐 역시 끈질기게 칼빈을 설득했고, 그를 데려가기 위해 스트라스부르까지 찾아와 강력하게 권했다. 결국 1540년 10월 24일, 칼빈은 파렐에게 “내 삶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에 나는 내 심장을 죽여서 주님께 제물로 바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파렐의 집을 보면서, 문득 파렐이 없었다면 칼빈이 3대 종교개혁자가 되지 못했을 수도, 제네바가 개신교의 중심지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루터가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종교개혁을 계속 지속할 수 있었던 것처럼, 칼빈도 진정한 종교개혁자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마틴 부처와 파렐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한참 동안 파렐의 집 창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제네바는 칼빈으로 인해 개신교의 중심지가 됐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칼빈은 생 피에르 교회에서 25년 동안 설교를 전했다.

칼빈의 생과 사가 담긴 곳
파렐의 집과 칼빈의 사택 사이에는 칼빈이 숨을 거둘 때까지 사역한 ‘생 피에르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13세기에 완공된 뒤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번갈아 가며 지어진 교회는 원래 가톨릭 성당이었다.

잦은 증·개축 덕분에 초기에는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었지만, 1535년 종교개혁이 제네바에도 일어나면서 교회 내 오르간, 제단 등 대부분이 파괴됐고, 1536년 개신교회가 됐다. 이후 1541년 제네바에 도착한 칼빈은 이후 25년 동안 생 피에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설교를 전했다. 


생 피에르 교회 내 양쪽에는 첨탑으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계단 통로가 있다.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좁기 때문에 뒤에서 누가 따라 올라올까봐 쉬지도 못하고 계단을 올랐다. 힘들다는 생각과, 계단이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커다란 종이 있는 층에 다다랐다. 제네바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여유로운 스트라스부르와는 달리 제네바는 집들이 빼곡하게 자리잡고 있었지만, 건물들 뒤로 보이는 산과 그 위에 쌓인 하얀 눈을 함께 바라보면서 또 다른 그림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생 피에르 교회 옆에는 칼빈과 존 녹스, 테오도라 베자 등 종교개혁자들이 신교도들과 망명자들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했던 작은 강당이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는 이곳에서 영어권 피난민들을 위해 목회하면서 스위스 종교 개혁을 배우기도 했다 하여 ‘녹스 채플’이라고도 불린다. 

▲ 종교개혁자 기념조형물. 칼빈 탄생 400주년과 제네바 아카데미 설립 350주년인 1909년에 착공해 1917년에 완공됐다. 조형물 중앙에는 종교개혁가인 파렐, 칼빈, 베자, 녹스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생 피에르 교회와 칼빈의 사택, 칼빈과 파렐, 베자, 녹스의 동상이 세워진 종교개혁자 기념조형물, 칼빈이 세운 제네바 대학을 지나 20여 분 정도 걸어가면 칼빈의 무덤이 있는 플랭 팔리에 공동묘지가 나온다. 1564년 5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을 마감한 칼빈의 무덤은 그의 유언대로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했다. 

당시 칼빈의 임종을 지켜본 종교개혁가 베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기록 속에서 칼빈이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추구했는지 느껴졌다. 
“나는 칼빈 옆에서 16년간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그의 삶은 첨가할 수도, 감할 수도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 해가 저무는 그날, 이 곳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던 가장 큰 빛이 하늘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 1564년 5월 27일, 숨을 거둔 칼빈은 그의 유언에 따라 제네바 플랭 팔리에 묘지 내 소박하게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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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2017-08-16 10:39:02
과학을 탐구하는 중요한 수단은 실험 계측과 수학 계산인데 그 2가지 수단에서 모두 오류가 발생하므로 과학 이론에도 흠결이 존재한다. 하나의 이론이 올바르다면 우주의 탄생과 운행을 모두 설명할 수 있으므로 다른 이론이 필요 없는데 고전물리학과 현대물리학이 상호보완하면서 공존하는 이유는 두 이론에 모두 흠결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이론은 우주의 모든 현상을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지 못하고 국소적인 상황만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임시방편이다

이산 2017-08-16 10:38:18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뒤집는 혁명적인 이론을 제시하면서 그 이론에 반론하면 5천만 원의 상금을 주겠다는 책(제목; 과학의 재발견)이 나왔는데 과학자들이 반론을 못한다. 이 책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하나로 융합한 통일장이론으로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본질을 밝히고, 자연과 사회의 모든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서양과학으로 동양철학(이기일원론과 연기론)을 증명하고 동양철학으로 서양과학을 완성했다. 이 책은 형식적으로는 과학을 논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문교양서다. 이 책을 보면 독자의 관점, 지식, 철학, 가치관이 모두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