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 가장 외로울 때 가장 뜨거운 기도를! 가장 비참할 때 가장 풍성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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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 가장 외로울 때 가장 뜨거운 기도를! 가장 비참할 때 가장 풍성한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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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0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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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 18

*사무엘상22:1~4>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지를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가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누가복음23:39~43> …중략…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

▲ 기도 중인 다윗 왕, 피에테르 데 그레베르, 1635~1640년.

5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친구. 단 한번도 주님의 품 안에서 떠난 적이 없는 그녀는 오래 전 이혼 뒤 혼자 살고 있다. 사업을 하는 내 친구는 부자는 아니지만 늘 누군가를, 어디인가를 찾아가고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로 완전히(경제적으로) 밑바닥까지 내려오고 말았다. 그동안 단 한번도 돈 때문에 고생하지 않은 그녀로서는 거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내몰렸지만 기특(?)하게도 주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집, 자동차,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도다! -잠언19:7)가 그녀를 떠났다. 그러나 놀랍게도 친구는 믿음이 더욱 굳세어지고 그동안 소홀했던 중보기도의 용사로 변했다.


“요즘은 중보기도를 날마다 한 시간씩은 하고 있어.” 친구의 말에 나도 지지부진했던 중보기도의 삶을 바로잡게 되었다. 그런데 2주 전, 그 친구가 어두운 메일을 보냈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처럼 가난하고 더구나 빚진 자, 이혼까지 한 사람이 나보다 잘 살고,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잘 사는 사람들이 단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기도한다는 게 우습게 생각됐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사람들이 알면 너나 잘 하라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중보기도를 받아주실까? 하나님까지 나를 비웃으시는 건 아닐까?” 


나는 메일을 읽고서 기도했다. 그러자 이런 마음이 들었다. ‘친구의 중보기도 능력이 점점 커지니까 사단이 방해를 하고 있구나. 이 고비를 넘겨야 해. 그런데 어떡해? 그래! 예수님처럼 내 친구도 말씀으로 이겨야 해!’

나는 기도했다. 친구의 중보기도 사역이 멈추지 않게 할 수 있는 말씀을 달라고. 그렇게 하루를 보낸 다음 날,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어느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같은 메시지를 발견했다. ‘다윗과 아둘람 굴’

그렇다.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의 나라까지 가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해야 하고, 하루도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없으며, 미래는 너무도 암담한 그 때에, 그런 다윗을 의지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대부분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다. 그것도 4백명이나!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처지와 관계없이 그들을 품는다. 힘이 되어준다. 내 친구의 걱정처럼 ‘자기 자신도 살기 어려운 다윗이 오지랖 넓게 그들을 중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는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법! 

나는 아둘람 굴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십자가에 달려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찢기고 피로 물든 예수님이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면 당장 십자가에서 훌쩍 내려와 봐!’ 조롱을 듣거나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가는 것 밖에는! 그런데 이토록 처참하고 비참하며 애통한 자리에 있는 예수님이 한 강도를 위해 영생의 축복까지 해주신다.

나는 친구를 만나 다윗과 예수님 이야기를 해주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친구는 아무 상황도 변한 것 없지만 ‘겉보기에’ 신앙생활 잘 하는 것 같은 사람들을 위해, ‘겉보기에’ 가정에 아무런 문제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척 보아도’ 고난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다.

가장 가난할 때 가장 깊은 기도를 하는 사람. 가장 외로울 때 가장 뜨거운 기도를 하는 사람.
가장 비참할 때 가장 풍성한 기도를 하는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중보기도의 용사 아닌가!

함께기도>>>
하나님, 우주를 생각하면 나의 중보기도는 개미 소리 아닌가요? 개미가 아무리 소리쳐도 이 세상 누구도 듣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소리. 그러나 하나님은 들으신다면서요? 하나님, 그래서 오늘도 중보의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오늘도 거룩하신 보좌 우편에서 기도해주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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