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곳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장차 큰 나무로 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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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곳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 장차 큰 나무로 설 것"
  • 한현구 기자
  • 승인 2017.06.2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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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르포//총회 방문단, '미답의 땅' 남미를 가다 (하)

선교사들의 사역지를 둘러본 방문단은 지난 5월 30일 밤(현지시간), 상파울루에서 벗어나 브라질의 옛 수도 리우데자네이루(Rio de Janeiro)로 향했다. 브라질 제2의 도시이자 남미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한 관광명소지만 불안한 치안 탓에 이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많지 않다. 같은 이유로 이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 역시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숙박과 이동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침대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새 여섯 시간을 넘게 달려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자 세계 3대 미항 코파카바나(Copacabana) 해변이 펼쳐졌다.

옛 포르투갈 상인들이 긴 항해를 끝내고 코파카바나 해변으로 입항할 때면 양쪽 끝에 든든하게 서있는 바위산 사이로 움푹 패인 해변의 모습이 마치 성모 마리아가 두 팔 벌려 맞이하는 듯 보였다고 한다.

해변을 짧게 둘러본 뒤 리우의 상징과도 같은 예수상으로 향했다. 코르코바도(Corcovado)산 정상에 있는 예수상에 가려면 전용 전철인 트램을 이용해야 한다.
정상에 올라 실제로 마주한 예수상은 실로 장관이었다. 예수상은 높이 38m에 무게는 1,145톤에 달한다. 리우데자네이루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 정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양팔을 쭉 뻗어 도시를 품고 있었다.

예수상이 바라보고 있는 해안가는 부촌이지만 슬프게도 예수상이 등지고 있는 내륙에는 빈민촌이 들어서있다. 그래서 이를 ‘예수상의 축복’이라고도 부르고 ‘예수상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상이 등진 곳까지도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며 일행은 리우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했다.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들을 섬기다
브라질에서 짧은 일정을 뒤로 하고 파라과이 선교지로 향하기 전, 브라질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3개국이 마주한 이구아수(Iguazu) 폭포에 들렀다. 본래 이곳은 파라과이가 단독으로 소유한 영토였다. 하지만 파라과이가 3국 전쟁에서 패하면서 인근 지역을 빼앗겨 3개국이 만나는 접경 지역이 됐다.

세계 3대 폭포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이구아수 폭포는 과라니어로 ‘큰 물’이라는 뜻이다. 폭포 앞에 서니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쏟아졌다. 빽빽한 일정으로 지쳤던 마음이 잠시나마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 이구아수 폭포를 찾은 방문단. 왼쪽부터 고준완 선교사, 이종승 총회장, 이경욱 사무총장, 김정진 선교사, 전응림 부회장

파라과이는 주변의 브라질, 아르헨티나에 비하면 조그만 나라다. 하지만 면적에 비해 거주하는 한인은 많은 편이다. 이민을 쉽게 받아줬던 파라과이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라과이에서 활약하는 총회 소속 선교사도 다른 남미 국가와 비교해 적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역하는 총회 선교사는 아순시온(Asuncion)에 김정진 선교사와 고준완 선교사, 인접 도시 빌예따(Villeta)에 곽성건 선교사와 김종삼 선교사 등 4명이다.

파라과이의 경제 사정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수도인 아순시온조차 브라질의 지방도시 규모와 비슷하거나 더 열악한 수준이었다. 도로는 돌 조각들로 조악하게 포장돼 울퉁불퉁했고 도시에 배수 시설이 전혀 없어서 조금만 비가 와도 홍수가 난 것 마냥 넘쳤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파라과이의 가정환경이다. 여자 아이들은 13세만 되도 아이를 가졌고 임신시킨 남자들은 책임감 없이 떠나갔다. 그러면 생계를 위해 다시 다른 남자를 찾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한 어머니 밑에 아버지가 다른 자식들이 있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원인은 파라과이의 아픈 역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1865년,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등 3개국과 벌인 전쟁에서 크게 패한 파라과이는 전쟁비용 배상과 영토 상실로 큰 피해를 입었고 남자의 대부분이 목숨을 잃어 남녀 성비는 1:4에 이르렀다.
극단적인 성비의 불균형으로 남자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여러 여자와 잠자리하는 문화가 생겼다. 시간이 흘러 성비는 다시 비슷하게 맞춰졌지만 그때의 문화가 여전히 그들의 삶 속에 남아있었다.

책임감 없이 남겨진 아이들은 잘못된 길로 빠지기 쉽다. 아이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마약거래가 이뤄질 정도다. 그래서 김정진 선교사는 이들을 위한 에스페란자(소망)학교와 에벤에셀학교를 세우고 파라과이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는데 힘쓰고 있었다.

현재 에벤에셀학교에는 150여명, 소망학교에는 60여명의 학생들이 교육받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빈민가인 까뽀비아에 거주하는 아이들이다. 

학교사역이 20년째 이어지다보니 교육도 세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었다. 김정진 선교사가 가르친 학생들이 부모가 되어 가장 믿을 수 있는 학교인 소망학교에 아이를 맡기는 사례도 많다.

이제는 학교를 통해 지역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김정진 선교사는 교육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소득은 아이들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부에서 뒤쳐지면 아이들이 자신감을 잃는다. 공립학교에 다니면서 5~6학년이 될 때까지 글도 모른 채 앉아만 있다오는 아이들도 많다”면서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마약과 범죄로부터 멀어진다. 교육의 가장 큰 목적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바르게 살아갈 이유를 찾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장을 둘러본 이경욱 사무총장은 “충분한 지원이 있다면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사역지들”이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총회 선교사들이 자랑스럽다. 이들에게 관심과 지원이 이어지도록 총회차원에서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 소망학교 방과 후 교실에 참여한 파라과이 아이들. 소망학교는 성적은 물론이고 아이들의 삶의 방향까지 바꿔놓고 있었다.

빌예따에서 벧엘기독학교를 세운 곽성건 선교사 역시 다음 세대를 키우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2002년, 파라과이에 입국한 그는 처음부터 교육 선교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원래 일본 선교에 헌신하던 그는 기도하던 중 남미에 대한 마음을 품고 파라과이로 향했다. 낯선 언어와 환경으로 사역에 어려움을 겪던 중 일본어가 가능한 목회자를 찾고 있는 일본인 성도들을 만났다.

일본인교회에서 10년가량 목회하는 동안 안정된 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또 다른 곳에 부르셨다. 권 선교사는 교회 사역을 일본인 목사에게 이양하고 아순시온보다 형편이 어려운 빈민 지역, 빌예따로 향해 학교를 세웠다.

벧엘기독학교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교에 찾아온 아이들은 바로 옆에 세워진 빌예따중앙교회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초등학생으로 시작했던 첫 입학생들은 이제 내년 중학교 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곽 선교사는 “첫사랑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이라며 “또 학교를 통해 믿음이 굳건하게 세워진 다음 세대가 파라과이를 회복시킬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종삼 선교사는 파라과이에 도착한 지 올해로 4년차다. 김 선교사는 빌예따에서도 외곽지역인 이따의바떼(Ita Yvbate)마을에 아름다운교회를 세우고 빈민들을 돌보고 있다.

이곳의 환경은 인디언 마을의 환경과 비슷한 수준이다. 주민들은 정부에서 토지를 제공받아 벽돌과 판자로 엉성한 주택을 지어 생활한다. 아직 교회 건물도 세워지지 않아 나무 밑에 옹기종기 모여 예배를 드린다.

번듯한 건물도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민들의 믿음은 자라고 있었다. 이따의바떼 아름다운교회는 작년 12월부터 성경 쓰기를 시작해 지금은 59명의 성도가 동참한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매입할 교회 부지를 선정하고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김종삼 선교사는 “성경쓰 기를 시작하자 예배드릴 때 성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성도들이 너무 열심히 성경 쓰기에 참여해 오히려 우리가 더 은혜를 받는다”면서 “교회 부지 매입부터 건축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이곳을 위해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현지인뿐 아니라 파라과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영성도 누군가는 책임져야 한다. 고준완 선교사는 한인공동체인 섬김의교회에서 그 일을 담당하고 있다.

고 선교사는 재정적으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 은혜를 경험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영 교회를 떠나겠다던 청년이 변화되기도 했고 병을 앓던 성도가 치유받는 역사도 경험했다.

고 선교사는 파라과이에 도착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교회 이름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섬기고 있었다.

▲ 방문단은 김종삼 선교사(왼쪽에서 첫번째) 사역지인 이따의바떼 마을에서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했다.

남미를 향한 한국교회 기도와 관심 절실
남미 선교지 탐방 대장정의 종착지인 아르헨티나. 지난 4일(현지시간) 도착한 이곳에서는 이병기 선교사가 어려운 아이들을 돌보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병기 선교사도 처음엔 한인교회 목회를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에 발을 디뎠다. 하지만 생각지 못했던 교회의 분쟁으로 5년이 넘는 시간 싸움과 소송에 휘말려야 했다.

힘든 싸움에 지쳐있던 중 아르헨티나에 방문한 기아대책 전응림 부회장을 만났다. 사정을 알게 된 전 부회장은 기아대책 훈련을 받고 협력 사역을 진행할 것을 권유했다. 그때부터 이 선교사의 사역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현재 이 선교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인근 라플라타(La Plata)의 감사공동체(교회) 엘리야 목사, 오마르 목사와 함께 협력 사역을 펼치고 있다.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방과 후 학교에는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몰려든다. 고무적인 것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부모도 함께 성장한다는 점이다. 변화되는 아이들을 보며 부모도 교회에 나와 상담을 받고 공부를 시작했다.

단순히 베푸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역과 주민들을 섬기는 일에 나섰다. 쓰레기통을 거리마다 놓고 도로 표지판도 설치했다. 교회의 문을 열고 소속감이 없던 아이들의 울타리가 되어줬다. 이 선교사와 감사공동체의 사역은 지역사회를 바꾸고 있었다.

아르헨티나를 끝으로 장장 12일의 남미 선교지 탐방은 지난 6일(현지시간) 마무리됐다. 3개국 8개 선교지를 돌기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쉽지 않은 여정이었던 만큼 한 곳 한 곳 방문할 때마다 울림이 컸다. 멀리 떨어진 남미 선교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기도와 관심이었다.

순방을 마친 이종승 총회장은 “오지에서 열심히 사역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사하다. 총회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음 아프다”며 “멀리 있는 선교사들이 더욱 힘있게 일할 수 있도록 총회에서 도와야 한다. 그들을 위해 기도와 관심을 더 많이 갖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복음이 필요하지 않은 곳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거리만큼이나 한국교회의 관심도 멀었던 남미. 총회의 이번 방문을 계기로 남미 선교지를 향한 한국교회의 관심에 불이 붙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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