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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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 강석찬 목사
  • 승인 2017.06.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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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찬 목사·예따람공동체

7년 전, 2010년 3월 26일 해군 초계함인 천안함(天安艦)이 침몰되었다.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되었고, 해군 장병 46명이 순국했다.

46명의 장례식이 거행된 후 2010년 6월 1일 한 신문사 논설위원의 글에서 읽은 내용이다. 국내 대기업의 임원이 신입사원 지원자에게 “6.25가 무엇인지 아는가?” 질문했는데, 5명 중 2명은 몰랐고, 3명이 “전쟁”이라고 답했다. “누구와 누구의 전쟁인가?” 했더니, 2명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전쟁”이라 답했고, 나머지 한 명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싸움”이라고 했다.

신문 논설위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가진 식당의 여직원들과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모른다고 했다. 안다고 한 그도 “일본과의 전쟁”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논설위원의 글을 우리나라 젊은이들 전체에 적용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은근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부 젊은이들의 6.25에 대한 인식이지만, 6.25를 모른다는데 놀랄 뿐이다.

시론자는 국민학교를 다닐 때,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의 ‘6.25의 노래’를 열심히 불렀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 ” 목에 힘줄이 생기도록 큰소리로 불렀고, 여학생들은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뛰면서 숨이 턱에 차도록 불렀다. 동요가 있었지만, 요즘 시각으로는 노랫말이 무서운 노래로 방송금지가 될 만한데도 정말 열심히 불렀다.

6.25를 겪은 후 반공(反共)교육으로 반공의식을 가슴 깊이 각인하였다. 국가에 의해서 세뇌(洗腦)된 것이라고 비판하는 말도 있는 것을 안다. 그러나 6.25가 무엇인가? 67년 전,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에 북한군이 얄타회의에서 그어놓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여 공산화(共産化)하려고 삼천리 금수강산을 쑥대밭을 만들며 전쟁을 일으킨 날이다. 5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겼고, 1,000만 명의 이산가족들을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전쟁이다.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경험한 사람들은 두 번 다시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다고 치를 떨며 말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도 가지며, 애국심을 키운다. 어느새 일제 36년의 고통을 몸으로 감당했던 세대들이 세상을 떠나고, 6.25의 참상을 겪은 어른 세대들도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6.25의 노래’는 초등학교에서 잊힌 노래가 되었다.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고, 휴전선(休戰線)은 말 그대로 6.25가 종결된 전쟁이 아니라 잠시 휴전(休戰)상태인 것을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6.25가 국민의식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만산(晩山) 강신정 목사(1913~1997)는 6.25의 붉은 난리는 한국교회를 포함한 남한 전역에 퍼져 있는 죄악을 응징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이라고 했다. 해방된 지 6년, 정부수립은 3년째인데 해방의 은총도 통일이 유보되고 있는 사실에 아랑곳없이 타락하고 분열하는 것에 대한, 선민 유대나라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하나님을 모르는 바벨론 군대를 몽둥이로 사용해서 70년간 포로생활을 시킨 것처럼, 하나님의 응징이라 하였다.

그런데 6.25가 발발하자 교계 지도자들은 모여서 “교회(敎會) 사수(死守)”를 결의했다가 누구보다도 먼저 피난을 갔고, 부산에서 다시 모여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만 충성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휴전 후, 약속은 공수표가 되고 도루묵이 되게 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세상으로부터 비난받는 교회가 된 것이다. 오늘은 6.25, 67주년의 날이다. 만약 제2의 6.25가 발발한다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킬까? 회개(悔改)하는 심정이 되어 호국영령(護國英靈)들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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