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위해 울라!” (Weep for your enem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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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위해 울라!” (Weep for your enemies!)
  • 정석준 목사
  • 승인 2017.06.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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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준의 시사영어 31

한참을 목욕탕 한증막에서 몸을 지지고 있을 때 어떤 아저씨 한 분이 들어 왔다. 힐끗 나를 처다 보고는 ‘젊은 분이 너무 오래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기에, 얼핏 봐도 나이가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 ‘동년배 같은데요’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그랬더니 ‘미안하지만 뭐 하시는 분입니까?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요’하여, 무심결에 ‘저는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그렇지, 목사가 무슨 걱정이 있어 늙겠습니까”고 해서 한바탕 서로 웃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어쩌면 절대로 하지 못할 일 하나가 ‘배려와 용서’이다. 자신은 삶이 힘들어 지치고 엄청 늙었는데, 목사는 맨날 교회에 앉아서 기도만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사는 줄 생각하니, ‘이 얼마나 늘어진 팔자(?)인가’를 그 사람은 분명히 비아냥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크게 패한 후 비통 속에 잠겨있던 ‘크세르크세스(성경에선 아하수에르)에게 아버지 ’다리우스‘가 꿈에 나타난다. 그리고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던 세 가지를 말해준다. 그 첫째가 ‘오만’이다.

희랍어로 ‘휴브리스(Hubris)’라 하는데, 그 의미는 “이 모든 일은 모두 다 내가 한 일이야.”라는 뜻이다. 둘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 같은 모양,(Ate)’으로, 곧 자기도취에 빠져 있으니 감사는 없고 다만 불평만 있게 되는 경우이다. 셋째는 ‘자업자득(Nemesis)’, 곧 “심은 대로 거둔다.(We reap What we sow)”이었다.

연극으로 올렸던 대사의 내용이지만, 전쟁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삶에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용서가 없는 것은, 한풀이는 아니라는 등 그 어떤 이유를 들어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여전히 ‘보복’일 뿐이다.

법과 질서를 내세우지만, 정작 초법적 무질서를 휘두르지 않으면 무엇 하나 될 일이 없다고 하는 발상 자체가 이미 그 증거이다. 또한 과거 자신이 행한 짓은 아랑 곳 없이 마냥 피해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모두가 ‘배려와 용서’가 왜 안 되는지가 이해되는 대목이다.

무대 위에서 통곡하는 ‘크세르크세스’의 눈물로, 모여든 이만의 그리스인 관객들이 함께 울었다. 여기서 “남의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본다.”는 ‘극장’의 희랍어 ‘떼이뜨론, thatron’이 생겨났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보면서, 그래서 차라리 누가 적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므로, 온 국민을 목 놓아 울려낼 수 있을까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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