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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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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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3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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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십자군 운동(4)

중무장을 한 십자군은 적을 격파하기에는 유리했지만 적이 도망을 치면 중무장을 한 십자군은 뒤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오랜 기간 동안 행군을 하면서 체력은 소진되고 지형에 밝지 못한 낯선 땅에서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은 한동안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적의 총 병력은 그다지 줄이지 못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빼앗은 성지를 지켜야 하는 일은 또 다른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곳곳에 십자군은 성을 쌓아 이 고민을 해결했습니다. 당시의 성들은 요충지마다 빠짐없이 들어서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요격하고 필요할 때는 힘을 모아 반격하는 보루가 되었습니다. 

본래 유럽의 성들은 영주의 최종 근거지로서 견고하고도 방어에 유리하게 지어졌는데, 우트르메르에서는 그것을 요새로 활용했습니다. ‘우트르메르’란 ‘바다 건너의 땅’이라는 뜻으로, 십자군 시대에 유럽인들이 중동의 정복지를 가리켜 부르던 말인데 유럽식 성곽 공략에 익숙하지 않던 이슬람에서는 한동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툴루즈의 레몽이 1104년에 완성한 요새는 180년 동안 한 번도 함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동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십자군 성채들을 볼 수 있는데 필자의 기억에 남는 성채는 요르단의 길 하레셋에 있는 ‘케락 성’과 시리아에 있는 ‘크락 데스 체발리에’(기사의 성채)입니다. 특히 시리아에 있는 크락 데스 체발리에는 800년 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200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십자군은 북쪽의 안디옥(안타키아)지역을 시작으로 남쪽의 예루살렘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한 뒤 남북으로 700km나 되는 이 지역에 50개가 넘는 성채를 축성하였습니다. 이 성채들은 십자군 특유의 건축 양식에 따라 하나같이 규모가 웅대했지만 13세기말 십자군의 패배와 함께 파괴되었습니다. 

그 후 8백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본래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오직 웅장한 골격들만 남게 되었지요. 그러나 단 한곳의 예외가 있습니다. 십자군 시대 성채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곳이 바로 시리아의 크락 데스 체발리에라고 부르는 성채입니다. 

‘기사의 성채’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당시 성채의 구조와 축성법 연구에 교과서가 되고 있습니다. 필자가 방문했던 2008년만 해도 비록 북한과 수교하고 있는 미수교국이었지만 관광객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지 않아 여행 금지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80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멋진 십자군 성은 한 번도 땅위에 쌓인 돌무더기에 불과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터키의 안타키아와 레바논의 베이루트 사이 주요 노선만을 방어하던 이 성은 1150년에서 1250년 사이에 세워져 확장되었고 나중에는 4,000명의 주둔군이 들어왔습니다. 

이후 몇 번의 공격 끝에 1271년 술탄 바이바르에게 넘겨졌습니다. 성 자체는 철벽 요새였지만 이슬람 군대에 포위되어 안에 고립된 십자군들은 먹을 양식과 마실 물이 떨어져 끝내 항복의 깃발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락 데스 체발리에는 해발 750m 칼릴 산 정상에 오각형 형태로 우뚝 서 있습니다. 길이는 남북이 200m, 동서가 140m나 되며, 면적만 해도 1만평에 이르는 큰 규모입니다. 이 성채의 특징 중 하나는 성벽이 완벽한 이중구조라는 것입니다. 우선 든든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외성보다 훨씬 높게 쌓아올린 내성이 성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외성과 내성 사이는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물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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