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포화 속에서 신앙으로 나라 지킨 4명의 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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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포화 속에서 신앙으로 나라 지킨 4명의 의인
  • 이인창 기자
  • 승인 2017.05.3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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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67주년 맞아 '호국신앙과 기독교' 인물 재조명
▲ 잔혹한 전쟁 속에서도 믿음의 선배들은 나라를 지키고 의를 살렸다. 사진은 고아들을 비행기에 싣던 ‘유모차 공수작전’ 모습과 미국 함정에서 손원일 제독.

같은 민족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인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7년이나 지났다. 깊게 난 생채기는 지금도 아물지 않고 있다. 하지만 애써 동란의 흔적을 지우려는 우리 사회 모습도 있다. 휴전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면 고통스럽더라도 기억해야 한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초개와 같이 자신을 내던졌던 선진들을 기억해야 한다. 목숨을 걸어야 했던 현장에서 진정한 믿음의 선배로 살았던 이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포화 속 신앙 선배들 4인의 삶을 되새겨본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
故 손원일 제독(1909~1980)은 우리나라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대한민국 정부가 설립되기 전부터 해군을 창설하는 데 기여하고, 초대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또 대한민국 군종제도를 창설하는 데 밑거름이 된 인물이었다. 

손 제독은 독립운동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평안남도 증산면에서 출생했다. 

손정도 목사가 정도제일교회에 시무하게 되면서 서울로 이주했고, 부친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출범 당시 임시부의장을 맡고 1921년 길림한인교회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손 제독은 학업을 이어가고 부친의 실천하는 신앙을 배웠다. 

특히 손 제독은 “바다에 미래가 있다”는 부친의 평소 말씀에 영향을 받아 해군이 됐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945년 11월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했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 후 그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부임했다.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던 손 제독은 1948년 우리나라 군대 최초로 해군 군종목사를 파송했고, 이후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육해공군 모두 군목을 두도록 제도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6.25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됐던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손 제독이 한국전쟁이 발발 전 미국에 12만 달러를 들고가 갖은 고충 끝에 구입한 ‘백두산함’의 역할이 컸다. 1948년까지 우리나라는 37함정을 인수했지만 모두 비전투함이었다. 앞을 내다본 그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의 전과는 없었을 것이다. 

손 제독은 전쟁 후 국방부장관을 맡아 국군의 날과 현충일 제정에 힘쓰면서 국방력 강화할 수 있는 노력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군에 몸담을 당시에는 해군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하고 예편 후에는 정동교회를 별세할 때까지 출석했다.

우리나라 해군은 2006년 국내 순수 기술로 건조한 최신형 1800톤급 잠수함 이름을 ‘손원일함’으로 이름 짓고 그의 생애를 기억했다. 

전쟁 고아의 아버지, 러셀과 딘 중령
러셀 블레이즈델 중령과 딘 헤스 중령은 목사이면서 한국전쟁 참전 미군이었다. 이들은 지금 전쟁고아 1천명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러셀 블레이즈델 목사는 1950년 7월부터 1951년 5월까지 미 제5공군 군목으로 참전했다. 그는 서울에 머물며 매일 아침이면 트럭을 몰고 서울시내를 다니며 전쟁고아를 학교에 모아 돌봤다. 

그러나 중공군 대반격으로 연합군이 후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고, 전쟁고아들을 놔두고 후퇴하라고 유엔군은 명령했다. 피난시킬 방법도 없었다. 

제주도로 피난시키기 위해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 고아들을 모았지만 추운 날씨에 아이들은 하나둘 목숨을 잃었다. 

전쟁 중 비행기 한 대가 아쉬운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눈물로 호소한 끝에 공군으로부터 1950년 12월 20일 아침 8시까지 오면 비행기를 태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1,069명 아이들을 수송할 트럭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멘트를 싣던 해병대 트럭들을 발견하고 “상부에서 아이들을 이송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거짓명령으로 14대 트럭을 징발해 아이들을 수송했다. 그날 아이들은 그렇게 비행기에 타 제주도에 안착해 고아원을 운영하던 딘 헤스 중령에게 인계됐다. 이른바 ‘유모차 공수작전’이다. 

그날 예정 시각보다 트럭 도착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체되었지만 비행기가 기다려준 것도 은혜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러셀 블레이즈델 군목은 명령불복종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그는 재판정에서 “누군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내게 주어진 일이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을 죽게 놔두는 일이라면 저는 전역하겠다”고 최후 진술을 했다. 

딘 헤스 중령은 목사 출신이면서 2차 대전 중 참전해 공군조종사가 됐다. 한국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 공군조종사를 양성하는 데 기여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제주도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러셀 중령과 함께 수송작전에 관여했으며, 제주도에 도착한 고아들을 받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다. 

딘 중령은 1956년 ‘전송가(Battle Hymn)’라는 제목으로 6·25 전쟁 수기를 출간했다. 그는 책에서 “제일 마지막 차례의 어린이가 C-47 수송기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문이 닫히는 순간 내가 느꼈던 그 지극한 감사와 안도감은 내 평생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UN군 참전의 결정적 역할 한 한경직 목사
영락교회를 설립하고 한국교회 큰 어른으로 살다가 청빈의 모범을 보였던 故 한경직 목사. 한 목사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침하자마자 한국NCCK와 같이 이튿날 뉴욕에 소재하던 IMC 국제선교협의회에 긴급전문을 보낸다. 

전 세계교회에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음을 그 즉시 알리고 기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WCC 세계교회협의회는 7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렸던 중앙위원회에서 한국전 문제를 긴급안건으로 상정해 중요한 성명서 하나를 채택했다. 제목은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

성명서에서 WCC는 “UN 한국위원회의 모든 증거가 북한군이 공격을 비밀리에 시작하고 계산, 조정했음을 지적하고 있다”며 전쟁에 대한 북한의 책임을 분명히 했다.

또 ‘경찰 조치’라는 표현을 사용해 세계질서를 위한 UN의 역할을 지지하면서, 각국 정부에는 협상과 화해를 촉구하는 데 나서야 한다고 요구했다. 성명은 세계교회가 UN의 군사적 행보에 정당성을 담보해주면서 UN의 부담을 줄여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컸다. 

만약 한경직 목사가 세계교회에 발빠르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면, WCC가 성명서를 채택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경직 목사는 또 1950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 미국인 밥 피어스 목사와 함께 전쟁고아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은 그렇게 출발했다.  
한 목사가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인 ‘템플턴상’을 수상하고 받은 상금 102만 달러를 북한 돕기 성금에 선뜻 내놓았다. 정작 자신은 2000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본인 명의의 집이나 예금통장 없이 청빈하게 살다 주님 품에 안겼다. 

통영상륙작전의 명장, 故 김성은 장군
1950년 8월 16일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상황이 계속되자 인민군은 통영을 점령하고 전략요충지인 거제도로 진출, 최후의 보루 부산을 점령하려는 작전을 세운다. 이런 인민군의 작전을 무력화시킨 것은 우리 군의 통영상륙작전이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이끌었던 당시 김성은 중령은 신앙인이었다. 

17일 새벽 해병대원 500여명은 인민군에게 장악된 통영 장평리에 기습적으로 상륙. 통영의 관문인 원문고개와 전략요충지 망일봉을 탈환함으로써 거제도와 부산을 지키고 6.25 전세역전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통영상륙작전으로 469명의 적이 사살됐고, 83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19명, 부상자는 47명에 불과했다. 이 작전에 대해 외신들이 ‘귀신도 잡을 작전’이라고 표현했고, 오늘날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의 시초가 됐다. 

김성은 장군은 통영상륙작전을 펼치기 직전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라고 기도했다.  

통영상륙작전 이후 그는 인천상륙작전, 9·28 서울수복작전에 참여해 큰 전과를 올렸다. 훗날 해병대사령관과 최장수 국방부장관을 역임하고 2007년 별세했다. 

김성은 장군은 통영상륙작전 이후, 맥아더 장군과 합류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으며, 9.28 서울수복작전에서도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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