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아니라 섬김’…조선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서서평 선교사

영화로 책으로 ‘서서평’ 열풍, 이 시대 섬김의 의미를 묻다 정하라 기자l승인2017.05.17l수정2017.05.17 16:37l13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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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조선 땅에 찾아온 ‘작은 예수’
의료선교 사명안고 빈민과 고아 위해 헌신
미 장로교 선정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작은 예수’, ‘조선의 마더 테레사’라 불리는 파란 눈의 외국인 선교사가 있었다. 일제식민지라는 암울한 현실 속에 간호선교사 신분으로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서서평 선교사(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1880∼1934)는 일평생 굶주리고 헐벗은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나누며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들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서서평 선교사의 섬김과 헌신의 삶을 조명한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감독:홍주연)가 입소문을 타며 꾸준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2일 기준 8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한 국내 다큐멘터리영화 중 가장 많은 관람객을 동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을 사랑하며, 조선의 작은 예수로 살아갔다.

그러나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서서평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조금은 낯선 이름이었다. 그의 수많은 업적에 비해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이 그 이유였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 이름이 한편의 영화로 제작되고 나서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 ‘서서평’은 누구인가?

서서평 선교사의 삶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어린 시절을 이해해야 한다. 1880년 독일 비스바덴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서서평 선교사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미국으로 홀로 떠나버리게 되자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서서평은 12살이 되던 해, 그리운 엄마를 찾아 미국에 왔으며,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기 위해 간호학교를 들어갔다. 정식 간호사가 된 후 뉴욕시립병원에서 일하며, 친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게 됐으며 1911년 뉴욕성서교사훈련학교를 졸업했다.

서서평 선교사가 간호학과 신학을 공부한 것은 생계수단을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을 고치고 영혼을 살리신 예수님의 사역을 따르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고민하던 중 마침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간호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912년 우리나라에 간호선교사로 내한하게 된다.

서서평이 가톨릭을 떠나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낯선 땅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절연을 선언하며 만류했지만, 이미 조선 땅을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낀 서서평은 결코 그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여성교육과 간호선교를 연 ‘선구자’

서서평 선교사는 남장로교 선교사역지 광주에서 병든 자, 가난한자, 그리고 차별 받는 여성들을 위해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또 가난하고 척박한 땅, 조선에서 이방인 선교사가 아닌 진짜 조선인이 되어 살아가길 원했다. 한국어 공부에 전념하여 한국어를 큰 어려움 없이 구사할 수 있었으며, 한자에 일어까지 공부했다. 

한글말살정책이 시행되던 일제시대, 한글 사용을 강조했으며 여러 서적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또 다른 선교사들이 미국식 삶을 고수하고 구별된 선교사 지정 자택에서 생활하며 여가생활을 즐겼던 것에 반해 서서평 선교사는, 무명 베옷을 입고 고무신을 신었으며, 양철지붕의 흙집에 살며 어떠한 잡기나 오락도 즐기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드리기 위해 애썼다.

의료 선교사의 사명을 안고 조선 땅을 밟은 서서평은 초기에는 간호사역을 가장 중심에 두었다. 내한 이래 기독병원의 전신인 광주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군산의 구암예수병원, 서울 세브란스병원 등에서 일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간호원을 총감독하고 훈련시키는 역할을 했다. 후에는 건강이 좋지 못해 간호사직을 사임하고 명예 간호사로 있으면서 선교는 물론이고, 교육사업, 구제사업 등을 했다.

나라를 잃은 당시 조선의 보건의료시설이 열악한 상황에서 서서평 선교사는 광주 제중원 등을 중심으로 아픈 사람을 돌보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가난한 여인들의 교육에 힘썼다. 특히 유년시절을 외할머니와 지내며 불우하게 보낸 그는 누구보다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의 심정을 잘 이해했다. 결국 그가 자라온 환경과 경험이 고아들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데 바탕이 된 것이다. 

▲ 여성의 권리가 땅에 떨어져 있는 조선의 현실에서 서서평은 여성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도 큰 역할을 했다.

여성의 권리나 지위가 땅에 떨어져 있고, 교육수준이 낮았던 당대 조선의 현실에서 서서평은 여성 리더십을 세우는 일에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조선 여성의 영적 리더십을 개발하고 성경공부를 통해 여성들을 자신과 같은 전도자로 양성하는 일에 주력했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줄 알아야 하는데 당시 조선은 특별한 부류의 여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로 인해 일반적 선교사들의 성경공부만으로는 여성 리더십을 일깨우는 일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서서평은 1920년 가난으로 교육의 기회를 놓친 조선인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시작했다. 

1922년 광주 제중병원의 간호사로 일하며 사재를 털어 양성학교를 시작했다. 자신의 좁은 침실에서 시작한 학교는 광주 양림동 뒷동산에 붉은 벽돌 3층의 교사를 짓는 것으로 이어졌다. 한국 최초의 여자신학교인 ‘이일학교’의 시작이었다. 

이일학교를 통해 당시 대부분 문맹으로 교육기회가 제한되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호남지역의 여성교육기관으로서 지위와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이후 이일학교는 현재의 4년제 종합대학인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했다. 

조선땅의 ‘한 알의 밀알’이 되다

서서평 선교사는 전라도 일대를 육로로 때로는 수로로 다니면서 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해 복음을 심었다. 당시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랑말을 타거나 달구지를 타고 나가 전도했다. 또한 1922년 부인조력회(현 여전도회전국연합회)를 만들어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했으며, 일종의 노방전도인 ‘확장 주일학교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으로 한국교회 주일학교가 활성화됐으며 1922년 한국주일학교연합회가 창립됐다.

특히 서서평 선교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돌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다. 조선의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 배우지 못한 사람들, 한센병자들의 어머니이자 선생으로 일평생을 헌신했다. 오갈 곳 없는 과부 38명과 한집에 머물렀으며, 13명의 고아를 자녀로 입양해 돌보는 삶을 살았다. 평생을 처녀로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극진한 사랑의 마음으로 고아들을 돌본 것이다. 

낮은 곳을 향한 서서평의 끊임없는 관심은 어린 시절, 생모로부터 버림받고 선교사로도 인정받지 못한 자신의 아픈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 쓰는 것에는 인색하고 타인을 위해 쓰는 것에는 관대했던 그는 자신이 받은 봉급의 대부분을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사용했다. 자신은 영양실조에 걸려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과부와 고아들의 생활비를 부담했으며, 제주도 교회의 선교사역을 감행했다.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평생 가난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한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5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임종 시 그가 남긴 소유물은 낡은 담요 반장과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이 전부였다. 자신의 담요마저도 반을 찢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주고, 나머지 반쪽을 자신이 추위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사후 자신의 시신마저도 의학용으로 기증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떠난 서서평 전도사. 그의 침대 맡에 붙어있었던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메시지는 그의 인생을 압축해 보여준다. 1934년 7월 7일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진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천 여명이 장례행렬로 따르며 ‘어머니 어머니!’라고 목 놓아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 중 1인으로 선정했다. 서서평 선교사를 통해 전남지역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양육되었지만, 일제 말기와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 격변하는 국내 정세로 업적만큼 그의 삶이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는 “행복이란 소유가 아니라 가난한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임을 교훈해 준다. 그녀는 출생이 불행했고 친모로부터 버림받은 처지였으나 서서평은 그것을 신앙적 섬김으로 승화시켰다”고 말했다. 또 그는 “서서평 선교사는 감사와 만족이 겸허한 삶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실천했다. 그녀가 낯선 조선 땅에 와서 상한 영혼들을 치유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의 능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삶은 오늘날 부와 명예,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성공과 번영에 물든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큰 도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성경말씀 속 지극히 작은 소자들을 위해 베푸는 삶을 실천한 조선의 작은 예수요, 하나님의 여종이었던 것이다.

김 박사는 “종교를 뛰어넘는 서서평 선교사의 사랑과 헌신의 삶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종교와 인종의 벽을 넘어 이웃인 인류를 섬기는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정하라 기자  jhara@igood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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