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자 피에르와 군중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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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자 피에르와 군중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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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5.17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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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십자군 운동(2)

십자군 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우르바누스2세와 함께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 은자 피에르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키가 작아 ‘작은 피에르’라고도 불렀던 은자 피에르는 사제도 아니고 수도사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언제나 당나귀를 타고 다니면서 이슬람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열정적으로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꿈에 베드로가 나타나 성지를 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지요. 

1095년 11월, 성스러운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신의 뜻이며, 전쟁에서 죽게 되면 천국에 간다는 우르바누스 2세와 은자 피에르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가난한 기사들, 농민들, 부랑자들, 어린이, 여자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섰습니다. 이렇게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교묘하게 이 미치광이 광신자를 앞세워 전쟁을 선동했습니다. 피에르는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월터라는 사람들과 함께 일반 민중들을 모아서 1096년 정식 십자군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모두 상징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어깨에는 †자의 표지를 달았으며 ‘교황이 하사한 하얀 삼베 십자가’를 어깨에 걸쳐 메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리들은 갑자기 모집되어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았습니다. 훈련이 전혀 되지 못하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다만 열광적인 신앙과 순수한 열정 하나로 결성되었던 오합지졸의 비공식 십자군인 ‘군중 십자군’은 떠나면서부터 말썽을 일으켰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한 방향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이 동쪽에 있으니 대략 그곳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식량보급도 없이 출발한 이 오합지졸들이 어떻게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했겠습니까? 지나가는 도시마다 공급받기를 원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귀중품을 팔아서 식수를 구입하고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만나는 지역 주민들은 이들에게 먹고 마실 것을 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군중 십자군은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하다가 헝가리 왕국 기병대의 반격을 받고 떼죽음을 당해 군사의 태반을 잃었으며 베오그라드 보병대에 또 다시 대패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1/4가량의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피에르의 지도하에 1096년 7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으나 동로마 황제로서도 이렇게 무지하고 무질서한 군중, 말이 십자군이지 거지 떼와 다름 없는 이들을 수도에 머물게 할 수 없어 바로 보스포러스해협 너머로 보내버립니다. 

그곳에서 이슬람과 싸우라는 뜻으로 비잔틴에서 떠밀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니케아에서 셀주크 투르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전멸당해 기사 레이날도는 항복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노예로 팔렸으며 피에르는 목숨만 건져 달아났습니다. 피에르는 프랑스에서 활동을 했는데, 독실하고 검소하며 헌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떤 다른 의도가 있어 백성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성스러운 신의 뜻을 따르며, 불쌍한 백성들에게 확실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선의의 마음에서 행한 일일 것이지만 결과는 참혹하였습니다. 

그의 종교적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군사와 정치 지도자로서 안쓰러울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그는 수도원 안에서는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수도원 바깥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남긴 유산은 광기와 상처뿐이었습니다. 민중 십자군은 성지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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