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내 얼굴, 당신 얼굴. 서로 다정하게 쳐다봐 준 적이 언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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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내 얼굴, 당신 얼굴. 서로 다정하게 쳐다봐 준 적이 언제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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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2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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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⑧

* 창세기 33:9~10>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이르되 ... 중략...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보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으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민수기 6:25~26>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후서 1:9>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요한계시록 22:3~4>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Bill Gaither Vocal Band(빌 게이더 보컬밴드)”는 나의 음악 세계를 완전히 바꾼 그룹이다. 나는 클래식부터 월드뮤직은 물론 헤비메탈까지 웬만한 음악을 섭렵했다고(듣는 차원에서)할 정도로 음악을 좋아한다. 몇 년 전에는 돈만 생기면 예술의 전당에 가는 바람에 그야말로 가산이 탕진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점점 말씀과 기도생활에 집중하게 되는 시기에 우연히 빌 게이더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빌 게이더와 그의 보컬밴드, 그의 음악 동지들의 합창만 듣게 됐다.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난 듯 했다.

예를 들어 ‘인애하신 구세주여’라는 찬송가는 할머니나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엿가락처럼 박자도 없이 늘어지게 부르며 간구가 아닌 한 맺힌 찬송으로 부르는 걸 당연시했다. 또,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라는 찬송가 역시 노인이나 부르는 찬송가로 치부할 정도로 사람들은 맥없이, 소망없이, 기쁨없이 부른다.


그런데 빌 게이더와 그 멤버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분명 같은 곡인데도 하늘과 땅에서 부르는 듯 우리와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찬송은 시편148-150편처럼 기쁨과 감격이 넘쳤다.

우리처럼 한풀이 노래나 신세한탄 타령조가 아니었다. “아! 찬송은 저렇게 부르는구나!” 라며 전율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찬송 외에는 아무 것도 듣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찬송가에 대해서 얘기하려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나는 아는 게 너무 없다. 그저 듣는 자, 부르는 자일 뿐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빌 게이더 멤버들이 찬송 부를 때의 태도이다. 한 사람이 노래를 하게 되면 둘러 선 멤버들은 든든한 지원군처럼 그 사람을 지켜본다. 낯 선 광경이 아니다. 서양, 특히 미국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경찰, 의료... 등등 그 자리가 어떠하든 둘러 선 모든 이들의 눈길이 한 발표자에게 집중된다.

‘우리는 당신 편이니 당당하게 하세요.’ ‘누가 뭐래도 우리는 당신이 잘 할 줄 믿어요.’ ‘혹시 누군가 반대를 해도 우리가 처리할테니 아무 염려말고 잘 하세요.’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선 한 사람에게 얼굴과 마음을 돌린다.  


그러나 동양, 특히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마이크 앞에 선 한 사람의 주위에 둘러 선 나머지 사람들은 멍하니 앞만 바라보거나 허공을 보고 있다. 그 어색함이란! 그 바람에 그 한 사람은 홀로 노래하거나, 홀로 연설을 하거나, 홀로 투쟁하는 듯하다. 나는 이런 장면을 수없이 보면서 서양인들이 앞에 나선 한 사람의 얼굴에 집중하는 게 성경에서 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말씀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는 사람, 죄를 사해달라고 아이처럼 발버둥치며 우는 사람, 그리고 오늘 당장 자녀 등록금을 낼 돈이 없어서 울며 기도하는 사람, 너무 아파서 기도도 못 한 채 신음소리만 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내 얼굴을 네게 향하여!” 하나님이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시는 순간, 말 그대로 우리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얼굴과 얼굴의 관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만 역사하는가? 그렇지 않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챙기지 않은 가족, 너무 친해서 너무 함부로 대하는 친구들, 너무 잘 알아서 너무 가벼이 여기는 교회의 성도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얼마나 보아주며, 얼마나 응원해주었는가?

그저 옷차림, 구두, 가방, 새로 바꾼 자동차, 새로 입주한 아파트를 바라보며 시기하고 험담한 적이 더 많지는 않았는가? 그러한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너무도 냉정하게 돌려버린다는 것은 까맣게 잊은
채.

함께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인데 우리 스스로 얼굴을 마음대로 바꾸며 살고 있습니다. 시기질투라는 쌍꺼풀 수술을 합니다. 위선허위라는 콧대 높이는 수술도 합니다. 자만자랑이라는 이마 수술도 합니다. 험담거짓말이라는 치아교정 수술도 합니다. 자기연민자기애라는 분칠도 덕지덕지합니다.

그래서 본래 주님이 주신 얼굴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느라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웃어주거나 응원하거나 그들의 눈물을 닦아준 적이 어릴 때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 가족과 친구, 성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힘과 위로를 전해주는 주님 닮은 얼굴되게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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