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탈출,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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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탈출,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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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3.2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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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영성 노트 "하나님, 오늘은 이겼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7절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중략)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 베드로의 해방, 라파엘로 산치오, 1514년.

3년 전에 이루어진 소그룹의 작가 예배 모임이 있습니다. 출판이나 문단에는 기독인이 극히 적어서 영적으로 외롭던 나는 1년 동안 기도를 했고,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 모임이죠.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번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하는데, 모이는 작가들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을 경험하는지 모른답니다.

그런데 지난 주 모임에서 한 작가가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성도 5백여 명 정도 되는 교회에 출석하기에 모두 가족처럼 지내는데, 자기 구역의 한 사람이 교회를 떠났다고 합니다. 이유인즉, 목사님이 두 번이나 자기의 인사를 대충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또 한 작가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번에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고 교회에 안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웃고 말았습니다. 내가 몇 십년을 교회 출석을 하는데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게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지요. 그러면서도 씁쓸했습니다. 이런 양태가 계속 되는 게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고, 무조건 울며불며 기도하면 다 들어준다고 설교하는 목사님들 탓일까? 시편 1편처럼 복 있는 사람은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자기 입맛에만 드는 성경을 줄줄 암송하는 사람들 탓일까? 하는 씁쓸함이지요.

그런데 이틀 뒤, 집에서 혼자 사도행전을 읽던 중 12장에 들어가면서 눈길이 뚝 멈추었습니다. 누구나 경험했듯이 수 십 번은 더 읽었는데도 마치 처음 읽은 것 같은 느낌.

야고보의 순교였습니다. 나는 짧지 않은 인생, 예배시간 속에서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 제대로 설교를 들은 기억이 전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나의 예배 삶 속에서 늘 들은 것은 야고보의 순교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의 기적이었습니다. 아니, 베드로의 기적에 대한 설교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이야기인가요! 상상해 봅시다. 12장 6절~10절 사이의 장면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부분처럼 우리를 잔뜩 긴장시킵니다.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무장한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한밤중입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얼마나 짙은 어둠 속일까요. 감옥 밖에는 역시 창과 칼로 무장한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고 있습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이라도 빠져 나갈 틈은 없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순교를 작정했는지) 군인들 틈에서 아예 신발을 벗고, 허리띠도 풀어 겉옷을 이불처럼 두르고 깊은 잠에 들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베드로의 성격이 훤히 보이기도 하지요. ‘어차피 내일이면 순교를 하고 예수님께 가는데 마음 편히 자자.’ 이런 생각이었을까요.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깊이 잠들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 시간에 정작 잠을 못 자고 눈물로 기도를 하는 사람은 교회, 즉 성도들이었습니다. 기도 덕분이었는지... 갑자기 주의 사자가 나타나고, 옥중에 광채가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났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헬라어로 ‘파탓소’인데 때려눕히다, 죽이다, 라는 뜻도 담고 있음) 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넋이 반쯤 나간 채 천사의 지시를 따라 옥 밖으로 나왔습니다. 완전히 밖으로 나와 거리에 서게 되자 그때서야 베드로는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구출하게 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에 모두 정신이 나가서인지 사람들은 바로 그 앞에 몇 줄 적혀진 야고보의 순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삶의 감옥 같은 지점에 처하게 되면 주님이 보내줄 기적의 천사만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21일 작정 기도를 했는데 자녀가 대학에 떨어졌다고, 100일 새벽기도를 했는데 남편이 승진 못했다고, 주방에서 화장실에서 눈물나게 수고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예수님에게 삿대질을 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처참하고 무력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은, 어린 소녀의 춤추는 잔치에 어이없이 희생된 세례요한은, 어떤 기적도 없이 단 칼에 순교한 야고보의 피의 기록은 하얗게 지워진 성경을 읽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기적처럼 감옥을 나온 베드로도 결국은 복음을 위해 거꾸로 십자가를 진 순교의 장면은 아예 듣고 싶어하지 않는 듯합니다.

함께기도>>>하나님,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됨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속마음이 사실 이렇게 천박함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더욱 필요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이생의 걱정과 유혹에 시달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 강력하게 성령님의 보호와 간섭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육신의 부모도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을 쓰듯이 고상한 사람, 위대한 사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아닌 무지렁이같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도, 아니 이 순간도 주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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