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한계는 없다… 난 75세 청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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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한계는 없다… 난 75세 청년작가!”
  • 이현주 기자
  • 승인 2017.03.2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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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작품 백석대 기증한 ‘보리작가’ 박영대 화백

1996년 한국 화단에 희소식이 하나 전해졌다.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한국 ‘보리작가’로 알려진 박영대 화백의 작품을 영구 소장하겠다고 전해온 것. 한지 위에 먹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은 동양적 소재를 사용해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의 생명력을 세밀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얻었다. 박영대 화백은 대영박물관이 선택한 한국인 첫 작가였다.

‘청맥’, ‘황맥’ 등 보리를 소재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소중함을 화폭에 담아낸 송계 박영대 화백. 지난 2월 백석대학교에 자신이 평생 그려온 작품 전체를 기증한 박 화백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붓을 꺾지 않고 화가의 길을 걸어왔다. 녹록치 않은 길이었지만 그의 곁엔 화가의 삶을 응원해주는 가족이 있었고, 그의 작품에 박수갈채를 보내는 동료들이 있었다.

고희를 훌쩍 넘겨 팔순에 다가서는 박영대 화백은 백석대학교에서 마련해준 작업실에서 제2의 화가 인생을 시작했다. 변화된 공간에 거는 기대는 ‘새로움’이다. 500호, 1000호짜리 대작을 그릴 수 있는 작업실을 얻었으니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반세기 넘게 그림을 그려온 화가에게 아직도 갈급함이 남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백석대는 지난 2월 17일 ‘보리생명미술관’을 개관함으로써 그의 작품 기증에 화답했다. 창조관 13층 상설전시관에는 그의 작품이 연대별로 전시되어 있고, 천안시민 누구나 그가 꾸민 ‘보리밭’에서 쉬어갈 수 있게 됐다. 박영대 화백을 만나 그의 작품인생을 들어보았다.

생명이 꿈틀대는 보리작가
‘보리작가’. 사람들은 박영대 화백을 이렇게 부른다. 사실 화가에게 평생을 따라붙는 별칭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그만의 확고한 작품세계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리는 어떻게 그의 상징이 됐을까?

“농촌에서 태어나 보리농사를 짓고 거들면서 보리에 대해 많은 정서를 느끼게 되었어요. 제 고향이 청주 미호천인데 미호천 변에 밀밭과 보리밭이 아주 많았지요. 바람이 불때마다 출렁이는 보리의 파동, 그 맥파가 상당히 아름답고 움직임이 강해 생동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리를 그리기 시작했지요.”

농촌 출신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화가가 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 숨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이든 부모 밑에서 동생들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숱한 고생을 했지만 꿈은 포기하지 않았다.

독학으로 공부해서 교사검정시험에 합격했고,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토록 원했던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박생광 선생과 조복순 선생을 만났다. 그리고 채색화를 접했다. 그의 화풍에 전환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서울 인사동으로 올라와 20년 간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게 이름을 알린 그는 한국을 넘어 일본과 중국, 그리고 유럽이 인정한 작가가 됐다.

75세 화가, 난 아직 청년작가
그는 보리를 소재로 한 첫 작품 ‘맥파’로 1975년 국전에서 입선을 했다. 심사위원들은 다른 데서 볼 수 없던 특이한 소재라며 그에게 계속 보리그림을 그릴 것을 권했다. 맥파를 소재로 작품활동을 계속하면서 그는 동아미술제, 백양회 대상 등 국내 주요 미술전을 휩쓸었다. 보리로 많은 작품을 남긴 후 그는 맥방석에 엿질금을 화폭에 담았고, ‘향’ 시리즈로 1981년 국전에서 또 입선을 하게 됐다.

‘보리’는 그가 명성을 얻게 된 소중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보리’에 얽매이는 화가가 되기는 싫었다. 그래서 생명을 담은 다양한 작품을 화폭에 담았고, 선은 굵고 힘차게 변화됐으며, 추상화로 화풍은 변화되기 시작했다. 소재의 제한도, 작품의 한계도 그에게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75세 노령의 화가는 당당히 증명하고 있다.

동양의 재료, 추상을 담다
박 화백은 “동양화 재료로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지만 나의 그림은 전통 산수화가 아닌, 추상적 개념의 현대화”라고 정의했다. 동양화 재료인 먹과 화선지는 번짐을 담아내고, 따뜻하고 푸근한 맛을 느끼게 한다. 서양 사람들 역시 그러한 감성을 공유한다. 서양재료로 서양화를 흉내 내는 작가들보다 그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거침없는 작품세계는 한계를 거부한다. 그림을 그리기 전, “관념과 관습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강한 날개가 필요하다”는 글을 되새긴다. 또 백지를 펴놓고 그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기도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고백은 자유를 허락한다.

“작가가 자기의식으로 그린 그림은 많지 않을 거예요.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는 무의식 중에 붓을 옮기곤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유로움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에게 자유로움이 있어야 보는 사람도 자유하고,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림을 바라볼 수 있어요.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죠. 이런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잘 그리겠다는 집착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다는 자유로움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죠. 그래서 화가에게 신앙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 작품 활동의 시작, 백석대에서
평생을 바쳐 그린 작품 전부를 기증하겠다는 통 큰 결단 역시 이러한 자유로움에서 비롯됐다. 작가에게 자신의 그림은 자식이나 다름없고,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소중하지 않은 작품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대 화백은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백석대와 인연을 맺고, 자신의 작품에 무한한 애정을 표해준 백석대에 기증을 결정했다.

“창고에 쌓아놓는 것보다 낫지 않아요? 전시회를 열 때는 주로 새작품을 소개하니까 오랜 작품들은 대부분 창고에 놓여있죠. 그런데 백석대에서 공간을 만들어주어 여러 사람과 함께 볼 수 있게 됐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제 전 새로운 작품에만 매진하면 되니까요.”

박 화백은 기증의 이유를 ‘변신’으로 답했다. 지난 것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작품으로 변신하는 것이 작가의 할 일이라는 것.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시간을 얻었고, 변화하는 기회를 얻었다고 말했다.

“보다 큰 작품, 대작을 그리고 싶어요. 이제 그림을 좀 제대로 그리기 시작한 거 같은데…후세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작품을 남기고 싶습니다.”

75세. 그는 아직 청춘이다. 그의 그림은 더욱 힘차다. 할 일도 많고, 그리고 싶은 것도 많다. ‘보리작가 박영대’는 이제 ‘청년작가 박영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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