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넷째주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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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넷째주 가정예배
  • 운영자
  • 승인 2017.03.2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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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살아계신, 함께하시는 하나님

히브리서 11:6
찬송 325장


천국이 천국 되는 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이 부요이며, 능력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믿어도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이유는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함께 있어도 의식하지 않으면 함께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함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언제나 ‘Coram Deo’(코람데오), 하나님이 항상 내 앞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고 내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시선을 인정하면서 살면 평안한 삶, 담대한 삶, 정직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라고 말합니다(행4:19~20). 살아있는 권력 앞에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든 까닭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삼상12:3). 사무엘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앞에서 살았기에 정직했고 깨끗한 삶을 살았습니다. 소유에 자유 했습니다. 충성된 삶도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 앞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의 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축복자요, 승리자요, 자족한자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되게 하소서.

박경배 목사(송촌장로교회)

화요일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35~45
찬송 268장


가버나움의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혼수상태가 되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문제는 귀가 도중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비보를 듣습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에 예수님은 단 한마디의 말씀을 던집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절).’ 사람들은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리다굼’ ‘아이야!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믿기만 하라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보고, 들으려 합니다. 아이는 죽었습니다. 죽음 앞에 어떤 장사도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상식을 뒤집으셨습니다. 야이로의 고백처럼 예수님만이 ‘구원받아 살게 하시는 분(23절)’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께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다.
둘째, 믿기만 하라는 것은 ‘예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인간들이 총동원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무용지물이 된 모든 노력을 멈추고 오직 예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수많은 군중들의 장벽이나 느닷없이 나타나 골든타임을 놓치게 한 열두 해 혈루병자 여인이 문제가 아닙니다. 참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그 분께 집중하지 못한 믿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위기든지 ‘참 믿음의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갑시다.

•오늘의 기도
나의 한계 앞에서 좌절과 포기했던 것들로부터 벗어나 전능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당당하게 서게 하옵소서.

고혁성목사(염광교회)

수요일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요셉

창세기 41:37~43
찬송 545장


요셉은 꿈 때문에 세 번의 고난과 위기를 당하게 됩니다. 첫 번째 고난과 위기는 형제들에게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창 37:24). 두 번째는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됐습니다(창 27:28). 세 번째는 누명을 씌고 감옥에 갇힙니다(창 39:20).
요셉은 꿈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꿈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꿈은 역경과 시련을 이기는 힘이 있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소망을 줍니다.
요셉은 꿈 때문에 팔려갔고, 감옥에 갔지만 꿈 때문에 애굽 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왕 앞에 선 요셉은 ‘내가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창 41:15~16)’라고 대답 합니다. 이 대답 속에서 그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오랜 역경과 고난의 세월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심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 왕은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것을 보고 자기 신하들, 점술가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요셉 속에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하나님이 요셉에게 지혜와 명철 주신 것도 알고 자기 집과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직을 주었습니다(창 41:40~43).
요셉은 감옥에서 궁궐로 나와 순식간에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형제들이 버리고, 권력자들이 버리고, 사람들이 다 버리고 외면해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잠시는 고난과 위기가 있을지언정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를 높은 자리로 올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있으면 위대한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성령 하나님이여! 나와 자녀에게 꿈을 주옵소서.

이규환 목사(목양교회)

목요일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말라

마태복음 27:39~42
찬송 212


도심의 카페에는 커피향보다 사람의 말들이 더 짙습니다. 지금은 얌전치 못한 말 많은 세태입니다.
일상 어디를 막론하고 누구를 모함하거나 사실과 다른 거짓말과 하다못해 불필요한 욕이나 험담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주는 무례한 말들이 허다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뚜렷한 현상입니다.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27:40).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그리로 지나가던 사람들이 조롱한 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으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애1:12).
그들은 십자가에 달린 몰골만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조롱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려야 합니다.
십자가에는 달리지 말아야 할 사람이 달리고, 정작 달려야할 사람이 달릴 수 없는 곳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사람은 결코 내려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말과 SNS(Social Network Service) 등이 상대방을 해치는 무기가 됩니다.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려올 수 있는데, 내려오시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구원은 없고, 심판만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오늘의 기도
모질고 험한 말을 들을 때에는 십자가에서 아무 말씀 없으셨던 주님을 생각하게 하소서.

최두길 목사(아름다운미션교회)

금요일

무지개 언약

창세기 9:8~17
찬송 446장


심판 이후(창6:5~7) 노아의 가족들은 1년 10일만에 방주에서 나왔지만 하늘에 먹구름만 덮여도 홍수가 날까 두려워 방주 안으로 뛰어갑니다.
이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표로 하늘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창9:11~15). 그 후 노아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지개 언약이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오늘날도 사람들은 죄악과  저주, 두려움, 낙심과 절망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무지개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먹구름에서 고통당할 때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우리를 깨끗케 해주셨다는 무지개 언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실패와 좌절의 먹구름이 엄습할 때 자책하지 말고 나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의 언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의 마지막 죽음의 먹구름이 몰려올 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같이 우리도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라는 무지개 언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만 보면 죄악과 좌절과 질병과 고통과 불안의 먹구름과 홍수가 밀려닥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을 바라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기쁨이 샘솟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아름답게 만드심은 하나님의 언약이 행복을 주고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을 믿음으로 세상에서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힘들 때 주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승리하게 도와주옵소서.

한용준 목사(의정부성만교회)

토요일

돌이키는 은혜

누가복음 5:27~32
찬송 259장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택하시고 부르셨을 때 우리가 보여야만 하는 반응을 가리켜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르심은 미래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를 부르신 것은(27절) 마태의 미래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세관에 앉아 누구보다 꼼꼼히 챙기고 맡은 책임을 다할 줄 아는 제자로서 마태의 미래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보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마태에게 일대 가치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소유가 행복의 모든 것으로 속아 살아왔지만, 예수님 안에서 참 사랑을 발견한 그는 구원의 축복을 받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혼자만 누릴 수가 없어서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고 그 자리에 여러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을 많이 초청했습니다(29절). 우리가 교회에 모인 것은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셋째, 성도의 구원은 회개로 완성됩니다.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시는 주님(제자들)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31~32절).
세상에는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과 죄인임을 부인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가 필요합니다. 구원의 본질은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구원은 반전입니다. 구원은 고백과 삶의 돌이킴입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성령으로 날마다 회개하며 구원을 완성해 나가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강동열 목사(순천화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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