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요! (I cannot keep my eyes 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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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어요! (I cannot keep my eyes open!)
  • 정석준 목사
  • 승인 2017.03.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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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준의 시사영어 ⑲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고난 후까지, 난 입버릇처럼 ‘엄마 없이는 살 수  없어요(I can’t live alone without you)’라고 했다. 그런데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어머니를 여의고 벌써 일 년이 지났다. 그러나 문득 문득 가슴이 저리는 것 빼고는 엄마 없는 세월을 지금 나는 너무도 잘 살고 있다.

예수를 믿고 나서부터, 주님을 뵙고 그분의 나라에 입성하는 희망으로 성도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사라졌다. 그리고 언제라도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순교정신’이 오늘 기독교의 찬란한 부흥의 역사를 이뤄냈다.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명량해전(Battle of Myeongnyang)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내민 마지막 카드는 ‘필사즉생(Those who seek death shall live, Those who seek life shall die)’이었다. 병서를 많이 읽은 그분에게야 당연한 말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12척의 배만 있을 뿐 350여척에 달하는 일본군의 전함 앞에 너무도 속수무책인, 패색 짙은 조선 수군에겐 별로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분의 말을 부하들이 얼마나 이해했을까 하는 의문을 뒤로하고 정말 조선의 수군(Choseon Naval forces)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큰 승리를 이뤄냈다. 지금도 절대로 이해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일을, 다 망한 그들은 해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써서 죽음을 외면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건물을 지어도 4층이 없다. 한자의 ‘죽을 사(death)’와 어감이 같다는 이유에서이다. 길가다가 영구차나, 사체를 보면 기겁을 하고 재수 없어한다. 결국은 나도 죽어서 갈 곳인데, 우리 동네에 ‘납골당(a charnel house)’이 들어온다 하면 목숨 걸고 반대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심지어 죽을 짓을 해놓고도 살 만큼은 살아보자는 식이다. 죽어본 사람이 없으니, 굴욕적이라도 살아남아 보자는 심보이다. 그래서 누구도 대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려하는 자가 없다.

성탄의 계절이다. 그러나 정작 ‘죽기위해 오신 예수(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다만 성탄 휴가(Christmas holiday)일 뿐이다. 비록 ‘고종명’의 순간이 아닐지라도, 건강하게 얼마든지 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을 앞당겨 ‘예수’ 위해 이 한목숨 던질 각오가 없는 이상, 심오한 인생철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동양철학의 종교사상에 이제 서구의 기독교는 더 이상 몸을 추스를 수 없는 시대에 이미 우리는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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