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과 분열의 시대, ‘3.1운동’ 연합 정신 본받아야
상태바
갈등과 분열의 시대, ‘3.1운동’ 연합 정신 본받아야
  • 김성해 기자
  • 승인 2017.02.24 2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지난 23일 학술 심포지엄 개최
기독교 비롯한 종교계, 타협과 양보로 독립운동 펼쳐

1919년 3월, 일제의 억압을 받던 우리나라 민중들의 입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독립을 외치는 소리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에서 출발해 전국으로 확산됐다.

3.1만세운동은 남녀노소, 지역, 계층 등을 무너뜨리고 한민족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그 중심에는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계가 자리 잡고 있으며, 국민 연합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3.1절 98주년을 맞이해 지난 23일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3.1만세운동과 종교계’를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은 서울 종로구 태화빌딩 지하 대강당에서 진행했다.

이날 기독교 등 각 종교계가 모인 자리에서 기독교 대표로 나선 감리교신학대학교 이덕주 교수는 일제 강점 초기 기독교계 활동과 3.1 운동을 위한 종교간 연대 과정을 조명했다.

▲ 3.1운동 98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역사학회는 심포지엄을 열고 기독교의 독립운동 역사와 의미를 되새겼다.

자유·해방·평등 위해 싸운 기독교
1880~90년대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밟기 시작했을 무렵, 한국은 자주독립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자유와 해방과 평등’의 원리를 품은 기독교를 소개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원리로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을 실시했다.

이덕주 교수는 “민족주의 의식을 지닌 기독교 지도자들이 포진된 교회 및 기독교학교는 일제 세력에 저항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거점이 됐다”며 “선교초기 기독교 복음 수용과 함께 민족운동을 경험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형성 및 심화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형성된 시점은 선교사들이 내한한 지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다. 1894~1895년에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개혁, 을미사변, 또 1896년 독립협회 운동은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줬다.

이 교수는 “개화파 정치인들의 ‘옥중 개종’과 남궁억, 박승봉, 민준호 등 양반·관료 출신 지식인들이 펼친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와 연동교회 국민교육회 등 기독교회가 펼친 다양한 민족운동은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거점으로 인식됐다”며 “이는 기독교인들이 항일 민족저항운동을 표출하도록 돕는 발판이 됐다”고 말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반도 내정에 간섭했다. 일본의 내정 간섭에 위기를 느낀 기독교인들은 조약 체결 반대 의사를 표명했으며, 민족 운동가들과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는 여러 형태의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세력을 넓혔다.

제약과 탄압 속에서도 성장하다
일본은 한국 기독교계가 민족운동을 펼치는 족족 짓밟았다. 대표적으로 ‘105인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사건’은 일본 조선총독부가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대거 검거하고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다. 

1911년 10월 12일, 일본은 기독교계 학교 중학생 3명 검거를 시작으로 서울과 평양, 정주, 선천 등에 자리한 기독교계 학교의 학생과 교사 300여 명을 검거해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강요했고, 1912년 경성지방법원에서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 중 89%는 기독교 신자였다.

이 중에는 북장로회와 북감리회 선교사들도 다수 연루되어 있었다. 미국선교본부는 이 사건을 향해 기독교 탄압사건으로 항의하며 일본에게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일본은 1913년 99명의 인원을 무죄로 풀어줬고, 윤치호, 이승훈 등 6명에게만 유죄를 선고해 징역 5~6년 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연구위원은 “105인 사건에서 6명만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일본 조선총독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정치적 판결”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은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려는 식민지 교육과 기독교계 교육이 배치되기 때문에 기독교와 사립학교를 탄압하려 시도했다”고 말했다. 

105인 사건 이후 기독교계 민족운동은 와해됐다. 일본은 ‘사립학교규칙’을 세워 기독교계 학교 내에서 성경공부 및 예배를 금지시켰고, 교수들의 언어는 무조건 일본어를 사용해 교육하도록 했다.

일본은 기독교계 선교사들이 학교교육에 손대지 못하도록 교사직에서 배제하려 했다. 김승태 연구위원은 식민지 교육을 총독부가 독점하고 교원도 일본어에 능하고 식민지 교육에 적합한 인물을 선점하려는 의도를 보여줬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갖은 제약에도 한국 기독교는 각 교파별로, 또는 교파연합으로 복음전도와 교육, 의료선교에 힘쓰고 신학교를 통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매진하는 일에 힘썼다. 김승태 연구위원은 “한국 기독교는 고난 와중에도 총회를 조직하고 해외선교도 추진하는 등 많은 탄압과 제약 속에서도 내적 조직을 강화했다”고 평가했다.

종교간 타협과 양보로 이뤄낸 연대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와 고종황제의 승하,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은 한국 땅에 있는 민족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의 불씨를 심어줬다. 또한 1919년 2월 12일, ‘105인 사건 동지’인 이승훈과 천도교의 송진우의 만남은 3.1운동이 교파와 종파를 초월한 민족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당시 천도교측은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 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정보를 입수하고, 주동자인 이승훈과 접촉을 시도해 연대를 계획했던 것. 기독교와의 연대에 성사한 천도교는 불교와의 연대에도 성공해 종교계의 연합을 이뤄냈다.

하지만 서로 다른 교파와 종파가 연대해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종교적, 심리적 갈등과 번민이 없진 않았다. 보수적인 신앙을 지닌 일부 기독교 목사들은 타 종교와의 연대를 주저했다. 감리교 목사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석구 역시 보수적인 신앙을 지녔기에 종교간의 연대를 두고 갈등했다.

이덕주 교수는 “신석구는 당시 교역자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 교리가 다른 천도교와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 뜻에 합한 일인지를 두고 고민했다”며 “그러나 신석구는 ‘나라를 잃은 것이 죄인데 찾을 수 있는 기회에 찾으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욱 큰 죄’라는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뒤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신석구 외 이승훈, 유여대, 신홍식 등 여러 기독교 인사들도 재판과정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 

이어 그는 “3.1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 및 종교계는 ‘종교 민족주의’ 성격이 강화됐으며 ‘종교간 연대’를 경험하는 장이 됐다”며 “이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갈등과 분열이 극대화된 오늘날 시대가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정신적 가치’로 남겨졌다”고 말하면서 한국교회가 3.1운동 정신으로 돌아가 연합하고 화해하는 일에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