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비스의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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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비스의 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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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1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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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프랑크왕국(1)

교회와 국가권력은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대립하면서 때로는 서로 돕고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역사를 엮어 왔습니다. 그 시작은 이미 주후 330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수도를 천도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250년 동안 박해를 받던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을 하자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로마교회는 점점 세속화 되고 권력 밑으로 들어가 백성 위에 군림하는 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군사적 힘이 동방으로 이동하고 476년 서로마제국이 패망하자 로마교회는 어떤 다른 힘의 보호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후에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게 된 것입니다.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 1세(Clovis I, 446-511 / 클로도비크 1세)는 프랑크족의 군주로 갈리아 프랑크족의 부족장이었습니다. 그는 35세가 되던 481년에 서유럽 대부분을 지배하고 486년에는 프랑크족을 통일하고 최초로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지역에 프랑크 왕국을 세운 왕입니다. 

클로비스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와 벨기에)의 로마인 왕국을 정벌하던 중 클로비스의 부하들이 어떤 교회(아마도 랭스 교회)에서 화려한 꽃병 하나를 강탈했는데 레미기우스 주교는 클로비스에게 편지를 보내 꽃병을 천주교회에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승전 이후 소와쏭(Soissons, 클로비스는 나중에 이곳을 수도로 정함)에서 전리품을 분배할 때 클로비스는 부하 장군들에게 합의로 정해진 몫 이외에 꽃병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프랑크족의 관습에는 국왕이라도 부하 장군들의 전리품을 함부로 차지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어떤 프랑크족 장군이 클로비스의 지시에 항의하여 도끼로 꽃병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왕은 그 꽃병을 깨진 채로 주교에게 돌려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 뒤에 열린 군사회의에서 클로비스는 자신에게 항명한 전사를 알아보고는, 불시에 장구류를 검열, 그 장군에게 무기를 제대로 손질하지 않았다고 호되게 나무라면서 그의 도끼를 땅에 던졌습니다. 

전사가 도끼를 집으려고 허리를 굽히자, 클로비스는 자신의 도끼로 그의 두개골을 쪼개면서 “너는 소와쏭에서 꽃병을 이렇게 다루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레고리는 그의 행위에 전적으로 찬성했습니다. 교회는 원수를 갚았고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클로비스의 부하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하 장수들은 클로비스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클로비스가 50대에 이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이 계기가 되어, 비록 왕조는 여러 번 바뀌었어도 자신이 다스리던 프랑크 족의 국가가 중세까지 유지되는 행운을 누립니다. 

클로비스는 게르만족 중에서 가장 먼저 가톨릭으로 개종을 했습니다. 원래는 클로비스 자신도 가톨릭을 믿을 마음은 없었다가, 로마를 정복한 15년 후에 다른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하는 바람에 다급한 상황에서, 3년 전 결혼한 아내의 간청으로 그녀가 믿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데 그후 다시 싸운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되자 진심으로 개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클로비스는 496년 성탄절에 그의 부하 3천명과 더불어 라임교회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이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교적 영향이 교회 내에 그대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래도 클로비스의 개종은 일반적으로 게르만 민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국가 간의 부단한 타협과 분쟁의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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