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싸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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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싸 놓고
  • 정성학 목사
  • 승인 2017.01.2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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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학 목사의 섬 목회 이야기(22)

25년 전 처음 제주도에 와서 집을 구할 때만 해도 제주도에는 부동산 사무실이 하나도 없었고, ‘오일장’이라는 생활 정보지를 통해 정보를 얻고 물어서 찾아 갔습니다. 아니면, 전봇대에 붙어 있는 ‘전셋집 있음’ 쪽지를 보고 찾아가던 때입니다. 그 때 모 아파트에 전셋집이 났다는 것을 알고, 물어서 찾아갔습니다. 가 보니 집도 좋고 가격도 무리는 아니어서 계약을 하기로 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대화를 하는데 “이사는 언제 오세요?” 하길래 “다음 주라도 바로 오게요” 하며 바로 이사해야 하는 형편을 있는 대로 말씀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분이 대뜸 “우리는 신구간에나 이사할 수 있는데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구간이 뭐예요?” 하고 물어 보니, “제주도 사람들이 이사하는 기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가 10월인데 신구간은 1월이었습니다. 왜, 서너 달이나 있어야 비워 줄 집을 벌써 내 놓았는지0 모릅니다. 저와 장로님들은 “세상에, 몇 달이나 후에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왜 벌써 내 놓았지?” 하며 다른 곳에서 집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제 기억 속에는 ‘신구간’이라는 이름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2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구간(新舊間)’이란, 제주 사람들이 오랫동안 지켜온 독특한 이사 풍습입니다. 그 기간은 24절기 중에 대한(大寒) 5일 후부터 입춘(立春) 3일 전까지 약 일주일에 해당되는 기간입니다. 2017년의 경우 1월 20일이 대한이고 2월 4일이 입춘이니까,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 일주일입니다. 제주도는 이 기간에 북새통을 이룹니다. 동서남북 주민들의 대이동이 모두 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 이삿짐센터는 밤을 새우고 일합니다.

그러면 이 신구간은 어떻게 생긴 풍습일까요? 이는 본디 제주 신들의 임무 교대 기간입니다. 제주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일 년에 한 번 신신(新神)과 구신(舊神)의 교대 기간으로, 이 때는 지상의 모든 신들이 옥황상제께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기간입니다. 필자는 지금도 이사 가는 날과 이사할 방향을 물어 이삿짐을 싸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이 기간에는 신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 땅에서는 아무 때나 이사를 해도 신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이삿짐을 옮길 수 있는 유일의 기간입니다. 그 때 잽싸게 이사를 하여 화를 면하는 것입니다. 이 때 신신(新神)도 1년 임기로 세상에 내려옵니다.

그처럼 신들이 제주도를 비운 기간에 주민들은 이동을 방해할 신들이 지상에 없기에, 이사하고 싶은 날과 지역으로 자유로운 이사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 살던 조상들은 특정한 시설이나 주거지 곳곳에 신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즉, 대문에는 문전신, 땅에는 지신, 바다에는 용왕신 등 모든 곳에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은 그 신들이 하늘에 올라갔기에 제주 사람들은 해코지를 받지 않고 걱정 없이 이사를 하거나 집 수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의 1만 8천 신들이 부재 중인 기간입니다. 그 때가 신구간입니다.

                                           정성학 목사 / 제주 기적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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