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통신(40) 자유라는 이름의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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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통신(40) 자유라는 이름의 보따리
  • 김창범 목사
  • 승인 2017.01.2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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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범 목사 / 더미션로드 대표

고난의 대행군 시절 이후, 북한 주민들의 행색은 나아진 것이 없다. 그들의 가장 특이한 모습은 누구나 등짐을 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항상 등에 얼러 멘 보따리에는 장마당에 내놓을 농산물 몇 점과 어디서고 눈에 띄는 풀이라도 채취할 칼이나 괭이 같은 도구가 들어 있다.

공산주의 사회지만 배급이 끊어진 지가 오래된 북한 사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력갱생의 길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나 크고 작은 등짐을 메고 다닌다. 그 보따리에는 저마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담겨 있다. 보따리가 두둑해야 그 날 하루 생명을 보장받는다. 

그런데 남한에 내려와 사는 탈북 형제들은 더 이상 북한 형제들이 진 등짐을 지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다른 종류의 보따리를 여전히 메고 다닌다. 그 보따리는 놀랍게도 ‘자유’라는 이름의 등짐이다.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탈북 형제들이 자유라는 선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댄 말이다.

북한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고대하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보장받는 것이다. 그래서 태영호 전 북한 공사는 자녀들에게 “노예의 사슬을 끊었으니 마음껏 자유를 누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북 형제들은 자유를 누릴 능력이 부족하다. 자유 앞에서 그들은 모두 어린아이와 같다. 그래서 자유가 힘들다고 한다. 참 기이한 일이다. 

몇 년 전 일이다. 남한에 온 탈북민이 1만 명을 돌파했을 때,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었다. 이날 많은 탈북 형제들이 초청되었는데, 생각지 못한 소동이 일어났다. 의정부에서 온 몇 형제들이 먼저 가야겠으니 기념 선물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10분만 기다리면 행사가 끝나니 그 때 받아가시라고 안내했다. 그러자 대뜸 그들 사이에서 고함이 터지면서 험한 말이 오고갔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 선물을 주라고 담당자에게 권유했다. 사태는 사그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이 불편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남한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켜야 할 사회적 약속에 익숙하지 않다. 자유라고 해서 누구나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기다리는 예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자기 생각만 내세우면 불만이 쌓이게 되고 결국 법의 재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자유는 나를 본능적 욕구에만 맡기는 상태가 아니다. 자유는 적절히 나를 절제하며 스스로 목표를 향해 자립해가는 능력을 배양하라고 주어진 자산이다. 이 천혜의 자산을 지혜롭게 사용할 줄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자유의 사용법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물론 자유는 탈북 형제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남한 사람들에게도 큰 문제가 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자유, 환경의 자유, 경쟁의 자유 등에서 낙오자로 살기 때문이다. 탈북 형제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공평하게 자유는 받았지만, 그 자유를 어떻게 이용하고 누릴지 감당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를 방구석에 밀쳐놓고 적응하지 못하고 남한 사회를 원망하며 불평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명령만 수행하는 소극적 생활습관에 젖어 자립적이고 창의적인 자기 생각이 불가능한 형제도 있다. 이들에게 격려와 인도가 필요한 것이다.

누가 뭐래도 자유는 탈북 형제들이 가장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받은 선물이다. 그러나 이 자유가 오히려 멍에가 되었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장 잘 사용하고 누리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은 곧 주님을 믿고 아는 진리에 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는 말씀대로 자유의 소유자가 되려면 주님을 알아야 한다. 자유의 보따리를 아직도 둘러 멘 탈북 형제들에게 자유를 가르치는 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선교의 목적은 자유를 전하는데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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