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95개조 면죄부 반박문과 한국교회 개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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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조 면죄부 반박문과 한국교회 개혁(1)
  • 김영한 박사
  • 승인 2016.12.27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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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017년은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 5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종교개혁의 불씨가 된 루터의 95개조 면죄부 반박문을 중심으로 한국교회가 갱신해야할 점들을 성찰하고자 한다.

I. 루터의 95개 조항 서문과 한국교회의 토론문화 개혁

1. 95개 논제의 서문

▲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모든 성인의 날(11월 1일)의 전날인 1517년 10월 31일 정오 당시 수도사요 신부요 문학석사요 성경학 교수였던 루터는 조교를 데리고 어거스틴 수도회의 북문에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 논제를 붙였다. 비텐베르그대 게시판에 붙여진 루터의 95개조 논제는 다음같이 시작한다: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에서 아래의 주제들은 문학 석사요 전임교수인 신부 마틴 루터의 인도로 비텐베르크에서 토론하고자 한다. 그는 토론에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사람은 서신으로 참여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중세시대 말기에 유럽에서 면죄부 판매는 상당히 오래된 관행이었다. 면죄부 판매를 반대한 사람도 루터가 처음은 아니었다. 루터는 당시 면죄부 논의에 대한 교회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으나 단지 학구적 수준에서 그것을 취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루터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추진하려는 생각을 전혀 가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교황 클레멘트 6세는 1343년에 면죄부 제도를 공포하였다. 경건한 기독교인이 일종의 감사헌금하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14세기 영국의 캔터베리 주교 위클리프가 면죄부를 반대하다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화형 당하였고 15세기에는 보헤미아의 후스가 반대하다가 화형당하였다. 1476년 페라우디(Raimund Peraudi)가 면죄부의 활용을 확대 해석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아마도 연옥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영혼들에게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 것이다.

2. 루터는 95개 논제는 단지 교회의 개혁을 의도

16세기에도 루터 외에 면죄부 판매에 반론을 제기한 신학자들이 많았다. 독일에서 경건운동을 주도한 베젤의 요한, 갠스포르트가 면죄부의 오용을 논박했고, 매우 존경을 받았다. 츠빙글리의 스승이자 바젤대학교의 교수이던 토마스 비텐바흐 역시 면죄부를 거부했다. 1515년 이후로는 많은 신학자들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신앙적 양심을 따라 용기를 내어서 이러한 신학자들의 양심적 반대의 출구역할을 한 것이다.

비텐베르크 성벽교회 출입문에 내건 95개 조항을 보면,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할 만큼 과격한 내용이란 별로 없다. 당시 로마가톨릭 교단 내부에는 다양한 그룹들이 있었고, 서로 다른 주장들을 놓고서 논쟁을 하곤 했었다. 탁발수도회나 프란시스코 종단에서는 이상주의적인 종말관을 갖고 있었다. 도미니크파와 어거스틴 수도회는 매우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개혁성향의 수도사들은 일반 사제들에 비교해 보면, 훨씬 과격하고 위험한 선언을 하였다.

어거스틴파 수도사 루터가 95개 조항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그리 엄청나게 새로운 신학사상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삭슨 지방에는 프리드리히라는 루터의 신앙을 지지하는 덕망있는 새로운 선제후가 들어섰고, 평신도 후원자들이 루터에게 호응하고 동조하게 되면서 그 이전과는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담대하고 힘차게 설교하는 루터는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즉각적인 논박과 대응을 주저하지 않았고, 출판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였다.

95개 조항은 기독교 칭의 교리를 성경적으로 회복시켰고, 인류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를 제공했다. 루터는 진정한 회개를 호소하면서, 면죄부의 허상을 고발하고 비판했다. 양심의 호소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자랑하던 교황의 권세가 무너지는 단초가 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그와 여타지역에서 온 학자들과 면죄부 가치에 관한  학술적인 토론을 하자고 논제를 붙인 것이다. 그 논쟁은 루터가 서문에서 말하는 바같이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진리를 밝게 비추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일어났다. 루터는 출세하려는 사람은 한 사람도 토론에 참가하도록 권하지 않았다. 그는 선제후를 그 일에 끌어들이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3. 오늘날 한국교회에의 적용: 성경적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자유로운 토론문화 형성 요구됨

루터 당시 독일 교회에서는 16세기였으나 자신의 견해를 순수하게 진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읽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하는 토론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루터시대의 교회의 토론문화를 보게 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교계의 문제에 대한 토론은 반성의 여지가 많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토론문화가 교권주의와 유교적 권위주의로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토론 문화는 너무 정치색이 농후하고 지방색과 파당색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한 학술적인 연구와 양심에 따른 솔직한 토의보다는 교파의 이해관계에 따라야 하는 복선이 있다.

대형교회 목사직 세습 금지조항 같은 이슈도 감리교단과 기장 교단에서는 수용되고, 예장교단에서는 통합만 받아들이고, 합동 등 보수교단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다. 여성 목사 안수 이슈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토론문화가 요청된다.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더욱더 성경과 자기 교단의 신학에 관하여 성경적이고 양심적인 연구를 해야 하겠고, 성경적이고 에큐메니칼 토론과 소통에 자유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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