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실 칼럼] 그들은 다른 곳에 “반응-reaction”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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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칼럼] 그들은 다른 곳에 “반응-reaction”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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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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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실 작가의 청소년을 믿음으로 키우는 빵과 기도-32

강연을 마치고 나면 참석자들이 어른이든 아이나 청소년들이든 빠지지 않는 질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작가로써 좋은 점과 나쁜 점은 무엇인가?’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가?’ ‘책이 정말 인생을 변화시킬까?’ ‘무한경쟁시대에 책이 정말 힘이(경쟁력) 있을까?’ ‘인공지능시대에 책을 읽어서 지식을 쌓는다는 게 원시적이지 않은가?’ 등등의 질문을 받지요.

물론 질문은 10여 년 전에 비하면 많이 달라진 것입니다. 예전만 해도 작가가 강연을 하면, 당연히 질문은 문학적인 향내를 풍기는 것들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마치 처세나 코칭 강사처럼 작가를 대합니다. 그만큼 삶이 어렵고, 무언가 확실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불안감이 커질 대로 커져서일 겁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느 지방에서 강연을 했는데, 오랜만에 ‘인간다운 질문(?)’을 받았습니다. 내가 굳이 ‘인간다운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류의 질문을 받아본 지 너무도 오래 되어서 반가워서이지요.

“작가님은 그동안 살면서 언제 가장 행복했어요?” 나는 단 일 초도 주저함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일입니다!”
그러자 질문자는 “내일이요?”하고 다시 묻는데, 그 표정은 마치 ‘뭔 소리야? 나는 진지하게 묻는데 저런 바람 잡는 소리나 하네? 작가에게 좋은 말 한 마디 듣고 용기 좀 얻어 볼까 했는데…역시 작가들은 현실감각이 없어!’ 라고 한탄하는 듯 살짝 일그러졌지요.

나는 진심을 담아 답했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나는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에서 부끄러움 한 점 없이 아름답고 행복한 때는 내일일 거야, 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무리 힘들고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억울하거나, 초라하다 해도 그 영광스러운 내일이 있으니까, 하며 참고 이겨냅니다. 오늘을 이겨내야지 찬란한 내일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자리에 앉은 어느 어머님이신가, ‘아멘!’ 하며 화답했고, 순식간에 그 자리는 웃음바다로 출렁거렸습니다. 그 강연 자리가 공공장소라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지만 나의 마음을 읽은 분이 계셨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강연을 마친 뒤에는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초등학교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며 ‘저는 교회는 안 다니지만요, 어제부터 너무 힘들었는데 선생님 말씀에 위로도 받고 용기가 생겼어요!’ 라고 간증 아닌 간증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나의 이야기 안에서 ‘기독교 색채? 완전 과장해서 말하자면 주님 마음? 이런 것이 흘러나갔다는 것이 놀라웠지요.

그런데 문제는 같은 이야기를 해도 청소년들은 좀처럼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예 어떤 느낌조차 받지 않는 이상한 존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반응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이 세탁기나 책상, 텔레비전, 주전자처럼 무감각의 존재는 아닙니다. 단, 아이들은 우리가 바라는 곳을 향해 반응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철저하게 좋아하는 것에만 반응합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나 성인들은 자기 마음이나 기호에 드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것이 옳은 거다. 저렇게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야 한다, 저런 방법으로 살아야 한다’ 등등의 말을 하면 어느 정도 그런 것들에 반응합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자신을 바꾸고, 아쉽지만 가던 길을 돌이킵니다. 또, 손해를 보더라도 포기하거나, 당장 이익은 없지만 내려놓기도 하지요.

그러나 청소년들은 ‘내 마음, 내 두 눈, 내 두 귀, 내 소원, 나의 오감각’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라면 그 곳에 먼저 반응합니다. 마치 ‘나의 오감’에 철저히 반응했던 청년 삼손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소원’을 신으로 삼은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두 눈이 멀기 전에, 아이들이 무엇인가의 포로가 되기 전에 그들의 시선과 마음과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곳에 반응하는 존재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빵과 기도
빵>>>라틴어로 reáctĭo -레악티오. -여성명사이다. 왜 남성명사가 아닐까, 생각해보자. 

기도>>>“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편6편 5절” - 주앞에 아무런 반응을 못 하거나 안 하는 자는 죽은 자와 방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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