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3]설교의 2차 완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파토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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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3]설교의 2차 완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의 파토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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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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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생명의 말씀을 품고 열정을 다해야 한다”
▲ 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설교의 완성은 크게 두 단계로 분류한다. 첫째는 설교의 원고화 작업 완성이고, 둘째는, 원고의 내용을 회중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의 단계를 완수했을 때, 드디어 한편의 설교가 끝이 된다. 설교학에서는 한편의 설교가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까지는 설교의 내용이 60%, 설교의 전달(Delivery)이 40%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 중요한 기본 전달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에는. 설교완성에 많은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원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언운반일념(聖言運搬一念)을 견고한 이토스(Ethos)로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토스의 실현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파토스(Pathos)를 품는 일이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은 메시지는 메시지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말은 그가 유니온신학교에서, 자신이 설교자로서 실패한 경험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그는 언제나 남다른 정성을 기울여 작성한 설교 원고를 가지고 설교단 위에 섰다. 그리고 그 원고에서 눈을 떼지 않고 읽었다. 그 때, 학생들은 그의 알찬 설교내용에 한두 번 주의를 기울였지만, 그 다음부터는 거의 대부분의 설교 내용을 졸면서 들었다. 그가 은퇴를 한 후에『문화의 신학』을 펴낼 때, 자신이 설교했던 기억을 회상하면서, 자신의 설교는 회중에게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못했던 실패한 설교라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설교현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유형의 설교자를 보게 된다. 첫 번째 유형은, 빈약한 내용을 가지고 탁월한 전달능력을 구사하여 설교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설교자이다. 두 번째는, 설교 내용이 매우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전달이 빈약하여 아쉬운 결과를 가져온 설교자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은혜로 가득한 설교 내용을 가지고 감화력을 수반한 전달을 하여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자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완벽한 내용과 감동적인 전달을 언제나 수반할 수 있는 설교자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거기에 근접한 설교자가 되려는 노력은 당연히 설교자의 의무사항이다. 설교의 전달에서 가장 필수적인 요건으로 파토스(Pathos)를 가슴에 품으라고 권하고 싶다.

설교는 냉철한 이성, 곧 지성의 기능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설교자들은 단순한 두뇌의 기능만을 가지고 회중을 설득하려는 경향을 많이 보이고 있다. 이에 반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땀과 눈물을 보이는 설교자는 매우 드물다.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설교자 자신이 혼연일체가 되어 가슴이 터질 듯 한 감동을 주는 설교자를 찾는 것 또한 힘들다. 날이 가면 갈수록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차갑기만 하다. 설교자의 불타오르는 열정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설교자가 필수적으로 가슴에 품어야 할 파토스의 어원은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을 뜻하지만, 정황에 따라서 이 용어는 다양하게 해석된다. 철학에서는 욕정, 성냄, 미움, 슬픔, 기쁨과 같은 일시적인 감정의 발로라고 말한다. 우리말 사전에서는 감정과 연결된 생각을 일컫는 말로서 정념(情念) 또는 정사(情思)라고 한다. 설교학에서는 파토스를 설교 작성에서부터 설교의 전달에 이르기까지 설교자가 기본적으로 품어야 할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한다.

먼저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가슴에 품고 그 말씀에 온 정신을 쏟는다는 뜻이다. 다음으로는, 이 생명의 말씀을 받아야 할 회중들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의미한다. 철학에서는 일시적인 감정의 발로처럼 이 용어를 풀이하고 있으나, 설교학에서는 항구적으로 품고 살아야 할 설교자의 기본 요소임을 강조한다. 설교자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을 품은 이러한 파토스가 성령님의 역동적인 역사와 서로 맞닿게 된다면, 설교자는 생명력이 차고 넘치는 설교자로서 회중들을 감동시키게 된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가 바라는 이향으로써, 우리 설교자들이 도전하고 경험해야 할 세계이다. 즉 이것은 설교자가 도달해야 할 설교의 경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운 의욕이 지나쳐 오히려 설교에 손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또 때로는 이렇게 중요한 설교자의 파토스가 인위적으로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설교자가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홀로 흥분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은 올바른 파토스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회중을 사랑하고 아끼는 연민의 정을 표현함에 있어서 유효한 눈물이라고 할지라도, 설교자가 설교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파토스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더욱이 그러한 모습이 습관화 된다면, 형식적인 절차처럼 오해받기가 쉽다. 그리고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파토스는 큰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잔잔하면서도 은혜의 물결이 넘치는 전개와 전달이 필요할 때가 더 많이 있으며, 이 때 설교자의 화려한 언어구사보다 그의 진지한 표정에서 더 깊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여기 설교자가 먼저 스스로 파토스의 작동을 점검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원고를 탈고한 후에 자신이 준비한 말씀을 붙들고 ‘주신 말씀에 내가 먼저 은혜를 받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회중 앞에서 있는 심정과 자세로 원고를 앞에 놓고 소리내어 설교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어느 부분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멘’의 소리가 나오면서 감동이 솟구치게 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자의 가슴에 파토스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다. 바로 그러한 부분들을 형광펜으로 표시해야한다. 이러한 준비를 마치고 설교단에 섰을 때, 그 부분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에 온 열정을 쏟음으로 그 느낌을 회중들과 함께 공유하고 호흡을 시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파토스를 효과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길이다. 설교자가 품고 있는 파토스의 숨결이 설교의 요소요소에서 솟아날 때 설교는 은혜와 감동의 파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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