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학생운동 과거·현재·미래(2)-캠퍼스여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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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학생운동 과거·현재·미래(2)-캠퍼스여 일어나라
  • 승인 2001.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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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전도활동 90년대 들어 '복음주의 운동'으로 비약

우리나라 기독학생운동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때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학교인 배재학당이 들어서면서 부터다. 북장로교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감리교선교사인 스크랜튼이 공동으로 1885년 배재학당을 세웠는데 그 안에 학생자치부인 ‘협성회’가 기독학생운동의 효시인 셈이다. 기독교인 중심으로 구성된 이 협성회는 애국계몽단체로 그 역할을 감당했다. 근대교육을 주도한 배재학당, 또 그 안에서 계몽운동을 펼쳤던 협성회. 초창기 우리나라 기독학생은 나라와 민족을 향한 선교열정을 불태웠다.

협성회 조직은 배재학당 설립 10년 후인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에 이루어졌다. 서재필은 매주 목요일 오후3시 애국계몽에 필요한 한반도 주변정세와 현실인식을 주제로 강의를 펼쳤으며 매주 토요일 오후2시에는 방청객과 함께하는 토론회를 열어 애국정신을 기독교정신으로 승화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토론 내용 중 특이한 것은 ‘기독교의 국교화’에 대한 부분인데 한국개신교의 요람으로 알려진 황해도 장연·소래에 ‘장연협성회’라는 지부를 구성, 이를 실천에 옮기려는 흔적이 남아있다.

협성회 구성원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배재학당 학생·교직원 만 회원으로 등록할 수 있었고 타학교인 경우는 찬성회원으로서 참석할 수 있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 개최여부로 임원진이 대거 구속됨으로써 해체된 협성회는, 우리나라 기독학생운동이 나라와 민족을 선교주제로 삼도록 하는데 좌표역할을 했다.

배재학당이 보인 협성회나 학숙청년회(후에 학생YMCA)활동에 힘입어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이른바 KSCF가 60-70년대 기독학생운동을 주도한다. 4.19혁명과 5.16사태로 이어진 암울했던 시기 기독학생들은 국제YMCA와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세계교회협의회(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등 단체들의 지원을 받으며 군사통치 반대를 이슈로 하는 정치문제와 인권침해·경제분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저항운동을 계속한다. 기독학생운동은 구속과 고문, 수배로 얼룩진 유신통치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이와같은 시기 보수권, 소위 복음주의권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1956년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주의 조직을 갖춘 기독학생회(I.V.F)에 이어 58년에 C.C.C·JOY선교회가 생겨나고 61년에는 U.B.F, 73년에는 예수전도단(YWAM), 77년에 한국기독대학인회(E.S.F) 등 복음주의권도 내부진열을 가다듬어 복음구령 사역을 전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

이들은 대학캠퍼스에 사역을 집중 시키면서 개인의 회개와 회심 그리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및 해외선교에 주력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창 부흥기를 만나고 있던 한국교회는 그러나 이같은 선교단체의 비약적인 활동으로 경계의 시선을 보내 연합·일치라는 사회분위기에 역행한다. 진보적인 선교단체가 그러하듯 복음주의권도 자신들이 지향하는 ‘목표’에 충실할 뿐 협력사업에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80년대 후반에 들어서 학생운동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바로 복음주의권에서 발견된다. 80년대는 12.12숙군 쿠데타와 광주민주화운동 등 큰 변혁이 일어난 시기. 시민운동이 사회저변에서 목소리를 크게 내고 기업별로는 노동조합 결속력 강화 현상이 일어난다. 이에 따라 학생운동이 담당했던 이념적인 이슈가 크게 사라지고, 특히 공산권이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일련의 현상을 목격하면서 대학가의 주이슈였던 이념논쟁은 더 이상 국민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역부족을 느낀다. 소위 ‘이념공동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은 이처럼 이념논쟁이 거의 자취를 감춘 시기, 즉 사회윤리와 종교윤리가 부각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하게 된다. 단체마다 건강세미나와 가정세우기 혹은 영성·치유목회 등 이념과는 동떨어진 삶의 질을 고양하는 주제들이 사회저변에 확산된다.

이 때 복음주의권 학생운동은 개별적으로 성장해온 역량을 한 곳에 결집하는 움직임으로 분주하고 암울한 시기에 뒷짐지고 있었던 스스로를 반성하는 모습마저 보이게 된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는 이승장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80년대 후반 왕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진보측의 빈자리를 메우는 시대적인 요청임과 동시에 30년동안 개별단체들이 성장해온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세계단체와 연계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 결과다.” 이승장목사의 이같은 말은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비로소 ‘운동’단체로 거듭나는 시기라는 지적이다. 80년대까지만해도 활동수준이었지만 90년대부터는 운동수준으로 전환됐다는 것인데 88년과 89년에 조직된 ‘선교한국’‘학원복음화협의회’가 그 증거라는 것이다. 선교한국은 기독학생의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는 곳이고 학복협은 교회와 단체를 연결해 교회부흥과 학원선교를 동시에 실현하는 곳이다.

이 때 이후 특별히 나타나는 현상은 복음주의 학생들이 공식적으로 사회참여를 선언했다는 점이다. 더구나 진보측 학생과 연대활동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공명선거 감시운동이 그것이고, 대북 통일운동을 위해 구성된 ‘남북나눔운동본부’도 한 예이다. 지난 97년 북한동포돕기 기독청년대학생 모금운동이 전국 320개 대학캠퍼스에서 벌어졌을 때 총3억5천만원이 모아져 북한 대학생 기숙사에 옥수수와 라면을 보낸 일이 있는데 이것은 복음주의 대학생운동의 운동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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