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2]설교의 일차완성은 원고를 마무리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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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복 교수의 설교학교 32]설교의 일차완성은 원고를 마무리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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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1.0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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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들은 발전을 거듭하는 설교자를 원한다
▲ 장신대 명예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

최근에 한국교회는 이단으로 규정된 교회들의 문제로 매우 복잡하다. 필자는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쟁점으로 등장하자, 이단들로 주의를 요하는 인물들의 설교 동영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저 설교자는 설교의 기초이론을 배운 적이 있을까?” “저 설교자가 맑은 정신으로 지금 말하고 있는 내용을 원고로 정리를 하고 단에 섰을까?”였다. 이단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그들의 설교는 설교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설교에 대한 공부를 하고 설교의 원고화 작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배운 설교자들이었다면 그러한 설교의 이탈은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능수능란한 언어의 구사와 전달의 기법이 설교의 정도를 걸었더라면 매우 우수한 설교자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동정심까지 나온 바 있다.

설교는 두 차례의 완성과정을 거쳐야 한다. 1차 완성은 설교의 내용이 토씨까지 완벽하게 원고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2차 완성은 설교단에서 회중에게 그 내용을 들려주는데서 이룩된다. 이러한 완성과정은 설교자가 평생 동안 지켜야 할 의무행위이다. 이러한 필수과정을 무시 하고 설교사역을 진행하는 설교자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로 얼룩지게 된다. 다음의 항목들에 동의한다면 설교의 원고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첫째는, 설교자가 본문에 대한 철저한 석의를 통한 완전한 이해를 한 후에는 말씀의 적용을 위한 자료를 수집 정리한다. 그리고 설교의 개요를 만들고 자료를 배열한다. 이때부터 설교자는 심신을 가다듬고 성령님의 섭시에 귀를 기울이고 메시지의 정리에 들어간다. 이 정리는 바로 자신이 외쳐야 할 메시지를 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이어야 한다.

둘째는, 설교자의 생각과 지식과 경험과 견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 막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길은 원고화 한 설교뿐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원고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성언의 주인이 돋보이고 설교자가 감추어지는 작업을 펼쳐 야 한다.

셋째는, 설교자의 언어는 필터가 필요 하다. 인간은 말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기 에 말에 실수가 가장 많다. 설교자가 말 에 실수를 하게 되면 그 역반응이 대단하다. 그래서 설교자는 평상시에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에 스스로 한 두 번의 여 과의 과정을 거쳐야한다는 충고를 많이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단에서 설교자의 언어에 실수가 나타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신이 사용할 언어의 질과 량을 필터링해야한다. 여기에 최선의 길은 자 신이 작성한 설교원고를 반복하여 읽으면서 수정보완 하는 방법이다.

넷째는, 설교의 권위와 질을 추락시키는 주범 중에 하나는 잡다한 언어와 불필요한 내용의 전개이다. 그리고 싫증이 나도록 이미 한 말에 대한 반복을 이어가는 때이다. 흔히들 말하는 설교의 불순물들 에 대한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을 역 시 자신의 설교원고를 주의하여 읽는데 서 삭제와 변경이 가능하다.

다섯째는, 총명이불여둔필(聰明以不 如鈍筆)이라는 말처럼 설교자가 아무리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정리된 설교의 내용을 그대로 또는 그 이상으로 전달 할 수는 없다. 원고에 수록된 내용과 자료와 선별된 어휘들을 원고 없이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원고에 실린 선별된 어휘들 과 아름다운 표현들을 지키고 싶은 설교자들은 총명보다 원고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여섯째로, 돌출 생각과 언어들이 나와서 메시지를 흐리는 예방책은 원고화 작업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이나 해석을 성령님이 주신 메시지라고 착각을 하는 것을 듣는다. 마치 성령님이 망각하였던 것을 설교대에서 생각나게 해주신 것처럼 생각한다. 여기에서 설교자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에게는 ‘망각’이라는 기능은 없으시다는 것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원고 외의 즉흥적이고 돌출적인 생각과 말들을 한 후에, 후회를 훨씬 많이 한다는 사실에 깊은 주의를 요한다. 일곱째로, 설교는 냉랭한 두뇌의 작용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가슴에 녹아 스며든 육화(肉化)된 설교만이 깊은 감동을 회중에게 안겨준다. 이 길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회중에게 설교하듯이 읽고 또 읽는 과정에서 내 가슴을 적시게 된다. 이 과정은 설교자가 단순히 원고를 외우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설교를 들려주고 자신이 은혜를 먼저 받기 위한 순간이다. 이 때 설교 원고는 어느새 나의 기억력까지 장악하여 회중 앞에서 원고의 종이 아니라 원고로부터 자유자로서 말씀의 종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때마다 설교를 원고에 담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 맡겨진 사명임을 깨닫고 수행하는 설교자는 밝은 미래를 열게 된다. 여기에 따른 고민은 원고를 소화하지 못하고 설교단에 올라서서 원고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만성이 고질화되면 아예 원고를 읽고 설교를 마치게 된다. 좋은 사례가 있다. 어느 교회에서 원고에서 눈을 끝내 떼지 못하고 은퇴한 목사가 있었다. 청빙위원들은 후임자를 모시는 과정에서 내놓은 첫 질문은 “원고에서 눈을 떼실 것입니까? 아닙니까?”였다. 회중은 모두가 정성을 다 기울여 설교를 원고에 담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원고를 읽는 것은 동의하지 아니한다.

설교자는 설교가 설교다워야 설교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말씀의 종’이라는 신분을 갖추고 설교라는 너울만 쓰면 모두가 설교로 인정받던 시절은 모두 끝났다. 충실한 설교의 준비는 설교를 원고화 하는데서 발전을 거듭한다. 우리 회중들은 발전하는 설교자를 뜨겁게 환영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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