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서 4년…하나님이 써가는 히스팝의 히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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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4년…하나님이 써가는 히스팝의 히스토리
  • 손동준 기자
  • 승인 2016.10.25 1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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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팝 단장 최종환 선교사 인터뷰
▲ 최종환 선교사

지난 2008년 국내 찬양 사역팀으로는 드물게 ‘힙합’과 ‘비보이 댄스’를 들고 나타난 히스팝. 데뷔 앨범 ‘히스토리’로 반향을 일으키면서 국내에서 탄탄한 활동이 보장됐던 이들이 “선교를 하겠다”며 홀연히 태국으로 떠난 지 4년이 흘렀다.

한국으로 말하면 올림픽경기장 규모의 큰 무대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고, 매년 동남아 최대 규모의 비보이 대회를 개최하는 등 히스팝은 태국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를 무대로 문화 선교의 새 장을 열고 있다.

최근에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이름을 딴 ‘엔터테인먼트 316’과 첫 번째 보이그룹 ‘316’을 런칭해 비즈니스 선교에도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히스팝 최종환 단장을 주축으로 히스팝의 모든 단원들은 이제 ‘선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자가 선교지에서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10월 베트남 나짱에서 열린 21세기형단기선교여행위원회 2차 아시아포럼에서 최종환 단장을 만났다. 이제는 ‘단장’이라는 호칭보다 ‘선교사’라는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그에게서 히스팝이 탄생하기까지의 사연과 최근의 근황, 히스팝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선교에 대해 이야기 나눠봤다.

 

성공 쫓던 젊은 프로듀서… 예수 만나 180° 변화

한국 나이로 41살. 겉으로 봐선 그가 불혹의 가장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노랗게 염색한 머리, 거칠게 기른 수염, 여느 중년 남성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춤과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이들과 늘 동고동락 하다 보니 자연스레 청년 같은 순수함이 묻어나는 것일까.

일찍부터 교회를 드나들었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 가치만을 열렬히 따랐다는 최종환 선교사. 20대에는 대중음악 프로듀서로서 성공을 쫓았다.

여러 앨범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즈음, 대형 기획사로부터 거액의 지원금을 받고 신인 솔로 여가수 프로듀싱을 맡게 됐다.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데뷔를 기다리는 사이 시장의 트렌드가 바뀌었다. 여성 솔로가수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는 판단을 한 기획사는 투자금도 포기한 채 프로젝트를 접었다.

“이게 뭔가” 싶었다. 음악을 하면서 배고프고 서러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데뷔’만 하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거라며 버텨왔던 그였기에 상실감도 컸다.

그때 예수 믿는 친구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학창시절, 함께 술 마시고 놀던 친구였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만나 CCM 밴드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다녔지만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때가 아니었기에 “성공한 다음에 음악적 달란트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며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친구는 장장 2년 동안이나 그에게 공을 들였고, 결국 인정에 못 이겨 합류하게 됐다.

“밴드 친구들을 만나며 많이 놀랐습니다. 나는 세상적인 것만 쫓았는데, 이들은 하나님만 바라보며 그것을 전부로 여기더군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 뭔지 모를 ‘갈급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음악은 촌스럽다’고 치부했던 제 안에서도 변화가 시작됐죠. 그들에게서 나에게는 없는 뜨거운 것이 보였습니다.”

이후 성도들의 공동체에 속하게 됐고, 성경공부도 하게 됐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다가 커다란 진실을 마주했다. ‘창조주가 나를 만든 목적이 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다. 여태껏 욕망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왔던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삶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오묘한 하나님의 방법

최 선교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도 여전히 욕심이 많고 어설펐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으로 기독교 음악의 퀄리티를 높이겠다는 교만이 가득했다는 것.

“정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를 쓰지 않으셨어요. 장장 4년에 걸쳐 철저하게 저를 낮추시고, 훈련 시키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너의 음악보다 너를 사용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음악을 내려놓고 과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지 고뇌했지만 하나님은 결국 제게서 그 고백을 받아내셨습니다. ‘주님 음악인이 아니어도 좋아요. 프로듀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있으라는 자리에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2007년 하나님은 힙합가수 양동근 씨를 그에게 붙여주셨다. 이 만남은 힙합과는 거리가 있던 최 선교사에게 힙합이 문화사역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 무렵 양동근 씨를 포함한 여러 실력 있는 래퍼들과의 교류가 늘어났고, 함께 홍대 등지에서 공연을 하는 등 여러 활동이 전개됐다. 당시 알게 된 이들 가운데 히스팝 초창기 멤버인 나태일 선교사가 있었다.

힙합을 베이스로 한 히스팝 사역의 기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이후 비보이가 결합되면서 히스팝의 사역은 현재의 형태로 발전했다.

 

▲ (사진제공:히스팝)

돌연 태국으로… 넓어진 외연

태국 사역이 처음 시작된 건 2009년이었다. 히스팝은 창단 후 첫 번째 해외 아웃리치로 동남아 문화선교를 진행했다. 그 대상국이 태국이었다. 당시 ‘아트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사역을 진행했는데, 한인 선교사들은 물론 현지 교회들은 히스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태국에 부는 한류 바람과 함께 가는 곳마다 인파가 모였고, 반응이 뜨거웠다. 복음의 열매도 많았다.

이후 몇 차례의 단기사역이 더 진행됐고, 히스팝은 사역의 공간을 태국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단기 사역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던 현지인들이 사역 이후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단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2집 앨범이 나오고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가 들리고 마음에 교만함이 싹트기 시작했을 무렵이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의 연습실과 차량까지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전원 태국 행을 선택했다.

막상 태국으로 왔지만, 단기 사역 때와는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 ‘귀한 청년들이 와줬구나’ 하며 반겨줄 거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정 반대였다. 히스팝의 사역을 대놓고 반대하며 훼방을 놓는 선교사도 있었다.

한번은 ‘지웨이브’라는 이름으로 현지의 댄서들을 모아 캠프를 열었는데, 장소 대여가 되지 않았다. 알고 지내던 한인 선교사가 히스팝에게 장소를 내주지 말라고 태국 교단에 요청한 까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가 ‘터닝포인트’가 됐다.

“그 선교사님이 정말 원망스러웠습니다. ‘하나님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저러시나’ 하며 분노가 치밀었지요. 한 달 간 단원들과 울며 금식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너의 적이 누구냐, 싸울 대상이 누구냐’ 물으시더군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은 선교사회나 태국 교계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응답을 받고 곧바로 그 선교사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일이 어떻게 됐든지 간에 선교사님을 사랑한다’는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이후 태국 교단의 문이 열리고 사역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대형 복음집회 ‘블레싱 타일랜드’의 메인 아티스트로 참가하는가 하면 현지의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들과 협연하는 기회를 얻었다. 아이돌 가수 2NE1의 전 멤버 공민지 양도 히스팝과 함께 하기 위해 한국에서 날아왔다. 당시의 공연 영상이 태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는 태국의 교계 뿐 아니라 전통 있는 선교사회에서도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 (사진제공:히스팝)

화려함 뒤에 감춰진 눈물

현재 히스팝에는 18명, 4가정이 소속돼 있다. 이 가운데 2가정은 한국과 일본에, 나머지 2가정은 태국에서 활동 중이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미혼이던 청년들이 이제는 가정을 꾸려 남편과 아내, 부모가 됐다.

문화사역을 하다 보니 대부분이 화려한 옷차림에 염색 머리는 기본이다. 겉으로만 보면 부족할 것 없이 ‘잘나가는’ 사람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겉보기와 현실에는 사실 적지 않은 괴리가 존재한다. 태국 사역을 시작할 때 단원 한명 당 개인 후원 30만원으로 시작했다. 현재는 개인 후원금액이 더 적다.

최 선교사는 단원들의 “엄청난 헌신”과 선교사님들의 후원,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열 명이서 300만원을 만들고 공동생활을 하면 ‘어떻게든 살 수는 있겠다’는 논리로 시작했습니다. 후원 대상도 교회나 단체가 아닌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주를 이루죠. 이런 친구들이 5천원, 만원씩 낸 돈으로 저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사역자가 불쌍하게 보이는 것은 사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이런 점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고 있죠. 한국의 기독교 방송에서 저희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단원들은 ‘이제 한국교회에서 관심을 좀 가져주겠다’며 기뻐했지만 막상 방송이 나간 이후 단 한 통의 후원전화도 오지 않았습니다.”

 

▲ (사진제공:히스팝)

새로운 도전

히스팝은 지난 5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설립하고 첫 번째 보이그룹 ‘316’을 런칭했다. ‘316’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뜻한다. 한국인 2명 태국인 5명으로 구성된 ‘316’은 지난 2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정식 데뷔했다.

최근에는 태국의 유명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최 선교사는 향후 이들을 통해 문화 사역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현지에 와서 보니, 단기 사역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히스팝이 무슨 연예인이라도 된 줄 알았지만, 막상 정착해서 사역을 하니 인원동원이 쉽지 않았습니다. 인원 동원을 위해 현지인 선교사들에게 의존하면 행사를 위한 행사가 되어 버리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온 아이디어가 엔터테인먼트 사역이었습니다. 분명한 대상과 목적이 있는 ‘선교가 되는’ 회사를 만든다면 한류열풍이 있는 동남아시아에서 선교의 중요한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최종환 선교사는 한국교회를 향해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한국의 찬양사역자들이 창의적 사역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 달라는 것. 찬양사역자들이 함께 소통하며 ‘세상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쫓을 수 있도록 돌파구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둘째는 재정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인원동원이나 성과 위주로만 투자가 이뤄지는 행사는 결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선교적 차원의 지원이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영적인 지원’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기도의 후원”이라고 말하는 최 선교사는 “가끔은 말 한마디가 그 어떤 것보다 위로가 되기도 하고 가장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면서 “진심어린 중보기도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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